본문 바로가기

뉴스

[문화人터뷰]박정희 단장 "속도의 시대, 보폭 지키는 연극의 가치는 더 또렷해지죠"

댓글0
연출가 출신…국립극단 두 번째 여성 단장
박정희 국립극단 단장은 연극이 오늘날 '속도의 논리'에 역행하는 예술이라고 말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점점 속도가 더해지는 시대 흐름과 달리, 연극은 한 편의 공연을 완성하기까지 반복과 축적의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이라는 설명이다.

"배우들은 보통 두 달가량 연습을 거쳐 무대에 오릅니다. 새로운 공연을 할 때마다 0에서 시작해 100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반복하죠. 점점 속도가 빨라지는 시대와는 반대 방향에 있는 예술입니다."

연극은 묵묵히 자기 보폭을 지키는 예술이라고 말하는 박정희 단장을 장충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박 단장은 기술이 주도하는 시대, 연극은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경제

박정희 국립극단 단장이 서울 중구 장충단로 극단 사무실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박 단장은 2024년 고(故) 백성희 배우에 이어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국립극단 수장에 올랐다. 단장 취임 전에는 2001년부터 20년 넘게 극단 '풍경'을 이끌었다. 연출가 출신인 그는 취임 이후 고유한 스타일을 지켜온 연출가들에게 무대를 맡기며 '안트로폴리스' 연작, '삼매경' 등 개성 있는 무대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연출가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동시대 취향과 패러다임이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타일을 지키려면 상당한 뚝심이 필요하다." 연극이 속도를 더해가는 시대 흐름과 무관한 예술이라는 설명과 맥이 닿아있다.

"연출가 나만의 스타일 유지하는 뚝심 필요"

오는 5월 선보일 '바냐 아재' 역시 이런 방향성 속에서 기획됐다. 박정희 단장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규모를 소화할 연출가를 고민하던 그는 조광화 연출을 떠올렸고, 작품 선택을 전적으로 맡겼다.

"연출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어야 좋은 공연이 나온다. 연출가 스스로 감동을 받아야 작품에 열과 성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광화 연출이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1920년대로 옮겨 '바냐 아재'라는 제목으로 공연하고 싶다고 해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연출가의 개성을 존중하는 방식은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의 실험성을 담보한다. 박 단장이 연출을 통해 실험성을 구현하려는 이유는 현재 국립극단이 운영하는 극장이 명동예술극장 한 곳뿐이라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국립극단은 2023년 7월까지 용산구 서계동에 자리하면서 명동예술극장을 비롯해 '백성희장민호극장'과 '소극장 판'까지 3개 극장을 운영했다. 명동예술극장이 1936년 일본 강점기에 지어져 무대와 객석이 명확하게 분리된 전형적인 극장의 형태라면 소극장 판은 객석과 무대 배치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가변형 극장이었다. 백성희장민호극장도 전통적 극장 구조였지만 일부 변형이 가능했다. 서계동 국립극단 부지를 복합문화공간으로 개발하는 계획이 추진되면서 국립극단은 서계동을 떠났고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를 거쳐 지난해 4월 현재의 국립극장 부지로 옮겼다. 서계동을 떠나면서 운영을 맡은 극장도 명동예술극장 한 곳으로 줄었다.

박 단장은 "백성희장민호극장과 판이 없어지면서 실험적인 공연을 선보이기 어려워진 점이 아쉽다"며 "명동예술극장은 실험극을 하기 어려운 공간"이라고 했다. 그는 "국립극단 작품은 작품성과 실험성의 균형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극장 여건이 허락지 않으니 연출을 통해 실험성을 구현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백성희장민희극장·소극장 판 아쉬워…실험극 어려워져"


서계동에는 2030년 극장 3개를 갖춘 지하 4층, 지상 10층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설 예정이다. 박 단장은 국립극단이 서계동을 떠나면서 2개 극장을 포기한 만큼 향후 조성될 복합문화공간 극장 운영에 대한 일정한 권한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명동예술극장 가동률은 96.7%를 기록했다. 일부 설비를 점검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항상 문을 열었던 셈이다. 국립극단 작품이 집중되면서 공연 작품 개수가 늘었을 뿐 아니라 인문학 강연, 관객이 직접 연극의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희곡 낭독 아카데미, 명동예술극장을 둘러볼 수 있는 '백스테이지 투어' 등 관객과의 접점도 늘린 덕분이다. 민간극단의 수준 높은 공연들을 초청해 공연 제작비를 지원하고 무대도 제공해주는 '기획초청 Pick크닉' 등 외부 극단 공연도 늘렸다. 박 단장은 국립극단이 국민의 세금을 받는 기관인 만큼 공공성을 강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시아경제

박정희 국립극단 단장이 서울 중구 장충단로 극단 사무실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올해 국립극단 5개 작품 해외 소개 "정부 지원 늘어야"

박 단장은 취임 당시 극장 가동률 제고와 함께 우수한 작품을 해외에 소개해 한국 연극의 위상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과거 국립극단의 해외 공연은 많지 않았으며, 대부분 해외 기관과의 공동 제작 형태였다. 대표적으로 2016년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프랑스 오를레앙 국립연극센터와 협업한 '빛의 제국'이 있으며, 자체 제작 작품으로는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사실상 유일한 해외 진출 사례로 꼽힌다.

박 단장은 취임 후 부서별로 국제 교류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을 뒀고 그 결과 올해 국립극단 작품 5개를 해외 무대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해 공연한 '헤다 가블러'와 '십이야'를 각각 5월 싱가포르국제예술축제(SIFA)와 6월 홍콩국제셰익스피어축제(HKISF)에서 선보인다. 국립극단 창작트랙 180도 사업을 통해 개발한 정세영 연출의 '소실점의 후퇴'는 7월 독일 켐니츠 연극제에 참가한다. 그 외 아직 작품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9월 중국 베세토 축제와 11월 유럽 무대에서도 국립극단 작품을 공연할 예정이다. 박 단장은 "기회가 닿지 않았을 뿐 해외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한국인 연출가들이 많다"고 말했다.

박 단장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올해 국제 교류에 배정된 예산이 5억원에 불과하다"며 "인력을 줄이거나, 무대 규모를 줄이는 방식으로 해외 공연을 준비해야 하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작품당 2억원 정도는 필요하다"며 "국제 교류를 위한 예산을 크게 늘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단장은 궁극적으로는 올해 해외에 선보일 십이야, 헤다 가블러 등의 해외 작가의 작품이라며 순수 창작극을 해외에서 공연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박 단장은 연극 공연에서 외래어보다 한국어가 많이 사용됐으면 하는 바람도 나타냈다. 그는 "연극은 우리말로 하는 모국어 예술"이라며 "한국어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대변하고 고유성도 있기에 그 가치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국립극단에 대한 관심을 당부했다. "밖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단장을 맡아 보니 직원들의 업무량이 상당하다.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소명 의식으로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국립극단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내주셨으면 한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경제 주요뉴스

해당 언론사로 연결

이 기사를 본 사람들이 선택한 뉴스

  • 스포츠월드2NE1 박봄, 건강 회복 후 ‘손흥민 고별전’ 무대 찢었다
  • 스포츠조선김태리 싱크로율 100% 그 아역 맞아? '좀비딸' 최유리, 이번엔 웹툰 찢고 나왔다
  • 중앙일보손질 걱정 없이, 집에서 간편하게 전복 요리 도전해요! [쿠킹]
  • 연합뉴스조계종 종정 "폭우에 신음하는 이웃에 따뜻한 손 될 수 있느냐"
  • 이데일리미디어아트로 만나는 국가유산…전국 8개 도시 개최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