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록(Telok)’은 말레이어로 ‘만이나 항구’를 의미하고, ‘아이어(Ayer)’는 물을 뜻한다. 텔록아이어는 ‘바다의 만’ 또는 ‘바다의 항구’란 의미가 된다. 이곳은 원래 싱가포르의 해안도로였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간척지로 싱가포르 국토가 넓어지면서 지금은 바다 대신 오래된 숍하우스(Shophouse) 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다. 현재는 중심업무지구이자, 각국의 힙한 레스토랑, 카페, 바들이 들어차 미식경쟁이 펼쳐지는 핫스팟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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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의 골목에 한국인 셰프 루이스 한(한석현)이 이끄는 한식 레스토랑 ‘내음(NAE:UM)’이 있다. 지난 2021년 문을 연 ‘내음’은 현재는 24석 규모의 작은 레스토랑이지만, 싱가포르에서 ‘한국식 파인다이닝’ 카테고리로 4년 연속 미슐랭 1스타를 지켜낸 유일한 곳이다. 지난해 농림축산식품부 해외 우수 한식당으로도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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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음’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향기를 뜻합니다. 갓 구운 빵 냄새에 어린 시절 동네 빵집이 떠오르고, 흙냄새에 할머니 댁 마당이 생각나는 것처럼요.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넘어, 각자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 그 아련한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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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현 셰프에게 ‘내음’이란 무슨 뜻이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나왔다. 그는 2019년 말 싱가포르에 한식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차리기로 결심하고,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파도를 뚫고 2021년 문을 열었다.
내음 레스토랑이 있는 텔록 아이어 거리는 싱가포르 다문화의 축소판이다. 한 블록 안에 불교사원, 이슬람 모스크, 힌두 사원 등 각종 종교와 문화가 공존한다. 중국계, 인도계, 말레이계, 유럽계 등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 수백 년째 어깨를 맞대고 살아온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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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음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중국계가 70%, 서양인이 한 20% 정도예요. 한국인은 많지 않습니다.“
싱가포르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의 팬층은 싱가포르의 중국계 미식가들과 서구 여행자들이다. 한식이 ‘글로벌 미식 언어’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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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주방에서 지휘하는 음식은 한식의 뼈대 위에 프렌치 테크닉을 얹고, 동남아의 향신료를 살짝 두르고, 서양의 플레이팅 감각으로 마무리하는 형태다. 싱가포르라는 다문화 도시 안에서 펼치는 ‘내음(NAE:UM)’ 만의 문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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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가 나올 때마다 일러스트 메뉴 카드 한 장이 함께 나온다. 수채화로 그린 투명한 그림과 설명글이 담긴 리플렛이 입맛을 돋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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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하시는 동안 저희 직원들이 음식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해드립니다. 한국에서 맛본 음식과는 많이 다르실 수 있어요. 하지만 되게 한국 느낌을 많이 받는다고 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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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내음의 메뉴 곳곳에는 한국과 싱가포르의 식재료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동치미는 로컬 과일 ‘잠부(rose apple)’로 담가 산뜻함을 높였고, 무침 요리에는 이 지역에서 흔히 쓰는 채소 ‘윙빈(winged bean)’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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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요리코스에 등장하는 단어는 동치미 외에도 감태와 토란, 젯방어, 메밀면, 만두, 전복, 주물럭, 대추 등 익숙한 한국어가 많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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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싱가포르의 작은 꽃들로 장식돼 있고, 인도와 중동, 유럽 등 다양한 국가의 스타일이 섞여 있다. 물론 기본은 고향의 내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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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고향은 가까이에 산이 있었어요. 언제나 숲 속의 향기가 감싸는 곳이었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면을 먹는 것을 좋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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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셰프의 요리경력은 20년. 그 세월의 절반은 여행으로 채워졌다. 레바논에서 유엔(UN) 소속으로 복무했고, 아부다비를 거쳐 싱가포르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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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멜버른의 ‘비지(Vue de Monde)’, 레바논의 ‘라 쁘띠 메종(La Petite Maison)’, 이탈리아의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을 거치며 그는 세계의 맛과 기술을 흡수했다. 하지만 그의 뿌리는 언제나 ‘서울’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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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공기는 또 달라요. 좀더 미네랄이 많지요. 제주 특산물로 만든 음식을 좋아했어요. 제 요리는 여행하면서 느낀 것을 토대로 풀어내는 음식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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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생각하는 요리란 레시피가 아니라 ‘살아온 날들의 총체적 기록’이라는 얘기다. 그에게 한국 음식은 결국 ‘냄새와 기억’의 음식이다. 된장의 깊은 발효향, 참기름 한 방울의 고소함, 김치 국물의 시큼달큼한 여운. 그 기억들이 서양식 코스의 틀 안에서 전혀 다른 언어로 재조합될 대 낯섦과 익숙함이 동시에 밀려오는 느낌을 주게 된다. 그는 깻잎·미나리·더덕 같은 핵심 향채류와 장(간장·된장·고추장)은 모두 한국에서 직송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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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의 육류 수급 환경에도 변화를 기대했다. 루이스 한 셰프는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제주산 소·돼지의 싱가포르 수출이 시작된 점을 언급하며 ”한우는 이미 싱가포르에서 너무 유명하다“며 ”앞으로 내음뿐만 아니라 싱가포르 내 식당에서 더 다양한 한식 메뉴 구성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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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음’의 또다른 자랑은 한국인 소믈리에다. 음식에 따라 와인을 페어링해준다. 샴페인으로 시작해 화이트, 레드 순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엔 한국 전통주로 마무리된다. 그는 “한국의 향과 기억을 담으면서도 낯설지 않도록, 두 문화를 자연스럽게 이어내는 게 내음이 생각하는 한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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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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