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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차 안, 아내의 마지막 눈빛 선한데”…산불 1년, 남겨진 사람들[더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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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씨 망막에 박힌 아내의 마지막
아들 잃은 옥자씨, “이웃 덕에 버텨”
피해 주민 87%가 외상후장애 위험
그래도 남은 사람들 “살아가야지요”
더뎁스(The Depth)는 사건과 사고 뒤에 숨겨진 입체적인 맥락을 파헤치는 시리즈입니다. 현장의 소음에 가려진 핵심 쟁점을 파고들어 ‘왜’와 ‘어떻게’를 선보이겠습니다.

결혼기념일을 닷새 앞둔 지난해 3월 26일. 김수태 씨(65)는 그날이 사랑하는 아내와의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경북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를 덮친 산불은 김 씨의 보금자리와 사과 농장뿐 아니라 부인 김수정 씨(당시 59세)까지 앗아갔다. 세찬 바람을 타고 불길이 수정 씨의 차를 덮친 것. 화마로 휩싸인 차 안에서 수정 씨를 구하려던 수태 씨의 얼굴에는 선명한 화상의 흔적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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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경북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에서 만난 김수태 씨의 얼굴에는 지난해 3월 산불로 인해 생긴 화상의 흔적이 가득했다. 김 씨는 당시 화재로 아내 고 김수정 씨를 잃었다. 안동=정동진 기자 haedoji@donga.com


그로부터 1년이 지났지만, 수태 씨는 아직 서울과 안동을 오가며 화상 치료를 받고 있다. 그날의 상처로 마을을 떠날까 고민도 했지만, 그를 붙잡은 건 박곡리 이웃들이었다. 혼자 남은 수태 씨가 끼니를 거를지 걱정이 된 주민들은 그에게 반찬을 나눠 주었고 타버린 과수원을 다시 가꿔 함께 살아가자고 했다. 11일 박곡리에서 만난 수태 씨는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살아야지요. 다시 살아난 과수원을 보면 아내도 먼 곳에서 좋아하지 않겠는교.”

● 가족 잃었지만 마을에 남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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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경북 안동시 남선면 신흥리 마을. 지난해 3월 발생한 산불로 인해 불에 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안동=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지난해 3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한 산불은 10만 ha(헥타르)가 넘는 산림뿐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과 친구도 집어삼켰다. 피해 지역 곳곳에는 1년이란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이달 5일과 11일에 걸쳐 만난 유가족들은 “이웃의 위로와 지지 덕에 살아가고 있다”고 입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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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경북 안동시 남선면 신흥리 마을에서 한 주민이 불에 타 뼈대만 남은 비닐하우스를 정비하고 있다. 안동=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5일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에서 만난 장옥자 씨(85)는 지난해 3월 산불로 가족 4명을 한 번에 잃었다. 산불이 마을을 덮친 그해 3월 25일, 옥자 씨의 아들(당시 60세) 부부는 처남댁을 구하려다 변을 당했다. 이들은 산불이 진화된 뒤 계곡 옆 길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같은 달 28일 처남도 끝내 숨을 거뒀다.

당시 옥자 씨는 첫째 딸로부터 소식을 듣고 “숨이 콱 막혔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날 입은 마음의 상처로 몸에 염증이 도지는 등 건강까지 나빠졌다. 약 1년을 포항시와 서울 등지의 병원을 전전하다가 지난달 말 다시 화매리로 돌아왔다. 옥자 씨는 “시집와서 이곳에서 애들까지 다 키운 정든 곳”이라며 “남은 생은 마을 주민들과 같이 아픔을 이겨내며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도 옥자 씨의 집에는 그를 찾는 이웃 주민 3, 4명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 피해 주민 87% PTSD 위험… 3명 중 1명은 “심리 지원도 효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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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경북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마을에서 지난해 산불로 키우던 소마저 잃은 류조기 씨가 불에 타 텅 빈 우사를 정리하고 있다. 안동=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수태 씨와 옥자 씨처럼 무너진 터전 위에서 다시 희망을 길어 올리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여전히 위태롭다. 1년이 지났음에도 주민들의 마음속엔 ‘꺼지지 않은 불길’이 일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린피스 동아시아 서울사무소 등 3개 단체가 17일 공개한 ‘2025 초대형 영남 산불 피해 실태조사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산불 피해 주민의 87%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열 명 중 아홉 명은 여전히 화마의 기억에 갇혀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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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리에서는 산불로 보금자리를 잃은 주민 상당수가 여전히 조립식 임시 주택에서 생활하고 있다. 안동=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그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1년간 2만 3468건의 심리 상담을 진행하며 트라우마 극복에 주력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장의 온도는 달랐다. 심리 지원을 받은 이들 중 35%는 “효과가 없었다”고 답해 ‘효과적(32%)’이라는 응답을 앞질렀다. 행정이 ‘상담 건수’라는 성과 지표를 쌓아 올리는 동안, 정작 피해 주민 절반 이상(58%)은 지원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결국 단기적인 상담 프로그램만으로는 이들의 깊은 상흔을 메우기에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의학적인 치료를 넘어, 주민들이 서로를 보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공동체 회복’ 중심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아내의 숨결이 남은 과수원에서 다시 사과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수태 씨의 간절함. 잿더미 위에서도 기어이 ‘평범한 내일’을 꿈꾸는 옥자 씨의 소망. 무너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끝내 터전에 남기로 한 이들의 결심은 정말 우리가 보듬지 못할 욕심일까.

안동·영양=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
안동·영양=정동진 기자 haedo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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