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억 추징·법정구속에서 대법원 무죄까지…조세 행정의 과잉
4101억원. 2010년 국세청이 시도그룹 권혁 회장에게 들이밀었던 세금 청구서의 액수다. 당시 국세청은 이 사건을 대표적인 역외탈세 적발 성과로 내세웠고, 언론은 '선박왕'이라는 호칭을 붙여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2013년 1심 재판부는 징역 4년과 벌금 2340억원을 선고했고 권 회장은 법정에서 구속됐다. 세간의 인식은 굳어졌다. 해운으로 큰돈을 번 기업인이 해외에 재산을 숨겨 수천억원의 세금을 탈루했다는 것이었다.
MB정부 시절 권 회장을 둘러싼 조사는 국세청과 검찰이 동시에 움직이며 진행됐다. 국세청은 역외탈세 조사라는 이름으로 시도그룹의 해외 법인 거래와 자금 흐름을 대대적으로 들여다봤고 검찰 역시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수사와 조사는 장기간 이어지며 권 회장과 시도그룹 전체를 겨냥한 전방위적 압박 수사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그런데 대법원 확정 판결에서 유죄로 남은 세액은 약 7억원이었다. 4101억원이 7억원이 된 것이다. 물론 세금을 매기는 문제와 형사 재판은 판단 기준이 다르다. 또 과세 불복 절차가 모두 권 회장에게 유리하게 결론 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대형 역외탈세 적발'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재판의 결말은 되짚어 볼 여지를 남긴다. 핵심 법인세 포탈 혐의가 항소심에서 무죄로 뒤집혔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최종 유죄는 해외 계좌에서 관리된 중개수수료와 배당소득에 대한 소득세 신고 누락이었다. 수천억원짜리 국부 유출 사건이 결국 개인 소득세 신고 누락으로 귀결된 것이다.
이 사건을 지금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는 권 회장 개인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사건이 제기한 법리적 질문들이 15년이 지난 지금도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질문은 배당소득 판단에 관한것이다. 배당소득은 회사가 벌어들인 이익을 주주에게 나눠 줄 때 발생한다.
문제는 선박금융 계약이었다. 국제 해운업에서는 선박 건조 자금의 상당 부분을 금융기관 대출로 조달하고 운항 수익으로 이를 갚아 나가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건물을 살 때 은행 대출을 받아 임대 수입으로 원리금을 상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금융기관은 대출이 모두 상환될 때까지 회사 이익을 주주에게 배당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을 계약에 넣는 경우가 많다. 대출 상환에 필요한 현금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과세당국은 시도그룹 계열 법인에 쌓인 이익을 권 회장이 사실상 배당받은 것으로 보고 종합소득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금융 계약상 배당 결의 자체가 제한된 상황에서 회사에 남아 있는 이익을 개인이 실제로 손에 쥔 돈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이어져 왔다.
세금을 부과하려면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 실제로 받지 않은 돈을 받은 것처럼 보고 과세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미국과 영국 등 주요 국가는 해외 법인에 쌓인 이익을 실제 배당이 없어도 과세할 수 있도록 별도의 제도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국제조세조정에 관한 법률에 ‘특정외국법인 유보소득 배당간주’ 규정을 두고 있다. 해외 자회사에 이익이 쌓여 있는 경우 일정 요건 아래 이를 배당으로 간주해 과세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다만 이런 과세는 법이 정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해외 법인의 지분 구조와 세율 수준, 소득의 성격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적용하도록 돼 있다. 권 회장 사건에서도 쟁점은 이 부분이었다. 금융 계약으로 배당 자체가 제한된 상황에서 회사에 남아 있는 이익을 개인의 소득으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법원은 이를 개인의 배당소득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 질문은 해외 법인의 실체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다. 과세당국은 권 회장이 홍콩 등에 설립한 다수의 해외 법인을 소득 은닉을 위한 페이퍼컴퍼니로 봤다. 그러나 선박 한 척마다 별도의 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은 국제 해운업에서 일반화된 관행이다. 배 한 척에서 사고가 나도 다른 배로 피해가 번지지 않도록 하는 위험 관리 목적이 크고, 금융기관도 선박 단위로 담보와 현금흐름을 관리할 수 있어 양측 모두에게 실익이 있는 방식이다. 마셜제도나 라이베리아에 법인을 등록하는 사례도 국제 해운업에서는 흔한 일이다.
법인 소재지가 세금이 낮은 곳이고, 자산이 선박 한 척뿐인 법인이라는 사정만으로 소득 은닉용 유령 회사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법조계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외 과세당국과 법원도 통상 누가 최종 의사결정을 했는지, 이사회 활동이 실제 어디에서 이뤄졌는지, 회계와 현금흐름이 어떤 실체를 갖는지를 종합해 판단한다. 법인의 설립 형식이 아니라 실질적인 지배와 통제를 따지겠다는 것이다. 항소심과 대법원이 법인세 포탈 혐의를 무죄로 본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세 번째 질문은 헌법재판소까지 이어졌다. 이른바 실질적 관리장소 개념이다. 법인이 홍콩에 세워졌더라도 실제 중요한 결정이 한국에서 내려졌다면 한국 법인으로 간주해 한국 세금을 물린다는 논리다. 헌재는 2020년 합헌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영진 재판관의 반대 의견은 이 개념이 법률 어디에도 명확하게 정의돼 있지 않아 납세자가 과세 여부를 예측하기 어렵고 과세 당국의 해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세회피 목적이 없는 해외에서 이뤄지는 사업 운영 방식까지 이 조항으로 포괄해 납세 의무를 지우는 것은 과도할 수 있으며, 기존 제도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영국, 호주, 캐나다 과세당국은 법인 거주지 판단 기준을 추상적 개념으로만 두지 않고 납세자가 사전에 예측할 수 있도록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의사결정과 운항, 금융, 회계 기능이 여러 나라에 걸쳐 분산된 해운업의 특성을 감안하면, 관리장소를 하나로 특정하는 것 자체가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는 점을 이들 나라의 과세당국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헌재 반대 의견의 문제 제기가 단순한 소수 의견에 그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모든 논쟁의 배경에는 해운업 자체의 특수성이 있다.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해운업에 일반 법인세 대신 선박의 크기, 즉 순톤수에 연동해 세금을 계산하는 톤세 제도를 운영하는 것도 이 업종의 수익 구조가 제조업이나 서비스업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선박 운항과 금융 조달이 여러 국가에 걸쳐 이뤄지는 산업 현실을 세제에 반영한 것이다. 권 회장 사건에서 문제가 된 선박금융 방식과 선박별 법인 설립, 홍콩 법인을 통한 운영은 국제 해운업에서 통상적으로 활용되는 방식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 점이 확인됐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전형적인 역외탈세 사건은 국내에서 번 돈을 해외로 빼돌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권 회장은 해외에서 형성된 자금으로 국내 조선소에 121척, 약 9조원 규모의 선박을 발주했다. 선박 관리와 보험 등을 합산하면 국내 경제로 유입된 자금이 13조원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돈의 흐름이 거꾸로였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전형적인 국부 유출 사례와 같은 선상에 놓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최근 국세청의 조치 역시 논란을 낳고 있다. 최근 국세청은 고액 체납자의 압류 명품을 인터넷 생방송으로 판매하며 “사고 싶어도 못 사는 에르메스 여기서 판다고? 명품 사고 애국하자”라는 홍보 문구까지 내걸었다. 체납 재산을 효율적으로 처분하기 위한 시도라는 설명이 뒤따랐지만 국가기관의 행사로서는 지나치게 가볍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세금을 내지 않은 이들의 재산을 이벤트처럼 판매하며 ‘애국’이라는 표현까지 붙이는 모습은 조세 행정의 무게와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 장면은 MB정부 시절 국세청이 벌였던 이른바 ‘왕 시리즈’ 역외탈세 조사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국세청은 해외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인들을 ‘선박왕’ ‘구리왕’ ‘완구왕’ 등으로 이름 붙여 역외탈세 적발 사례로 공개했다. 국제 조세라는 민감한 영역의 사건에 별칭까지 붙여 홍보하며 진행한 조사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특히 역외탈세 조사는 일반적인 탈세 사건과 달리 국제 거래와 여러 국가의 세법이 얽혀 있는 분야다. 거래 구조가 복잡하고 해석의 여지도 많아 조사 과정에서 높은 전문성과 신중함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당시 과세 당국은 충분한 전문성 검토보다 실적경쟁과 홍보만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한 채 정상적인 국제 경제활동에 불안감을 키우고 자본 이탈이라는 부작용만 남겼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명품 판매 생중계에 ‘애국’이라는 구호까지 붙이는 지금의 모습은 조세 행정이 이벤트처럼 소비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과거 논란과 닮아 있다. 두 장면은 조세 행정이 지켜야 할 전문성과 일관성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 회장 사건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배당이 제한된 상황에서의 소득 인식 문제, 해운업 특유의 법인 운영 방식에 대한 과세 판단, 실질적 관리장소 개념의 명확성 문제는 지금도 국제 거래를 하는 기업과 과세당국 사이에서 잠재적 분쟁으로 남아 있다.
15년 전 이 사건에서 충돌했던 법리와 산업 현실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건은 다시 소환된다. 해외에서 형성된 자금이 국내 산업으로 흘러 들어오는 통로였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해외에서 외화를 벌어 국내 산업에 투자해 온 권 회장과 같은 기업인을 향해 국가는 황금알을 낳던 거위의 배를 스스로 가른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아주경제=한석진 기자 sjhan0531@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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