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1일 제주도 서귀포시 유채꽃프라자에서 상춘객들이 봄을 만끽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
“차별하지 말자”, “혐오하지 말자”, “인권을 보호하자”…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오늘날 한국에서는 자주 위협받는 말들입니다. 이런 말을 외치면 일부 종교계와 극우단체의 격렬한 반대(백래시)가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최근 10여년 동안 곳곳에서 학생인권조례나 인권헌장이 폐기됐고, 시민 다수가 동의하는 차별금지법은 출발조차 하지 못했죠. 정치권은 반대 세력의 눈치를 보느라 침묵하고요. 오늘날 국내 인권 관련 제도·규범은 ‘암흑기’를 지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던 중에 지난해 12월10일 제주도가 ‘제주평화인권헌장’을 공식 선포했습니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성적 지향·종교·출신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말자는 내용을 담은 인권 규범입니다. 제주 역시 이 헌장을 만들면서 엄청난 백래시에 맞닥뜨렸지만, 다른 곳들과 달리 부당한 압력에 물러서지 않고 헌장을 선포했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백래시의 시대, 제주는 어떻게 혐오·차별의 파도를 넘었을까요? 지난달 말 제주를 찾아 헌장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어요. 오늘 레터에서는 점선면이 취재한 기획기사 <경해도, 봄은>을 소개합니다. 기사 링크는 레터 말미에 모아뒀습니다.
머리 맞댄 이웃들
헌장은 2022년 7월 당선된 오영훈 제주도지사의 200여개 공약 중 하나였습니다. 원래는 ‘인권헌장’을 제정하려 했는데요. 선거캠프는 여기에 제주 4·3사건이 갖는 ‘평화’의 가치를 더해 ‘평화인권헌장’으로 키웠습니다. 무게가 더해진 평화인권헌장은 오 지사의 10대 공약으로 올랐습니다.
이번 헌장의 특징은 공무원이나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도민들이 직접 토론을 통해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제주도는 ‘도민참여단’ 참가 신청을 받은 뒤 제주의 성별·연령별·지역별 인구 비례에 따라 100명을 무작위 추첨으로 선정했습니다. 내 곁의 ‘평범한 이웃’을 닮은 도민참여단이 꾸려질 수 있었죠. 도민참여단은 ‘4·3과 평화’ ‘건강과 안전’ ‘다양성’ ‘자연과 환경’ 같은 주제들을 놓고 2024년 4~5월 네 차례 토론해 헌장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초안 내용은 인권운동가들도 놀랄 정도로 수준이 높았습니다. 성별·종교·출신·장애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4·3사건을 기억하고 회복하며 왜곡에 맞설 권리, 평등하게 일하고 교육받을 권리 등이 빼곡히 담겼죠. 정치인들이 ‘민감한 주제’라며 쉬쉬하는 성소수자나 이주민의 인권도 도민들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도민들도 참여단 활동을 긍정적으로 기억했어요. 홍창부 4·3희생자유족회 부회장은 “4·3 이야기를 내가 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말한 게 인상적이었다”며 “다들 열성적이었고,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의견을 존중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고1이었던 고채운씨도 “나이가 많은 어른들도 나를 편하게, 친절하게 대해 줬다”며 “전에는 몰랐던 장애인 이동권 문제도 새로 알게 됐다”고 했어요.
백래시를 넘다
제주도와 제정위원회는 헌장 초안을 들고 2024년 9월 초 두 차례 주민 공청회를 열었어요. 그런데 보수 개신교 단체와 극우단체들이 들이닥쳐 행사를 파행시켰습니다. 고함을 치며 단상을 점거하거나, “평화와 인권은 좌파의 선전선동용 단어”라며 혐오 발언을 퍼부었죠. 그들은 그 뒤로도 몇 달 동안 제주도청 앞에서 기자회견과 집회를 연달아 열었습니다. 도청 앞은 성소수자를 원색적으로 헐뜯는 혐오 발언과 고성으로 연일 아수라장이 됐죠.
육지에서도 자주 있었던 일입니다. 2014년 서울시는 시민 숙의를 거쳐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만들려 했는데, 보수 단체들의 격한 반대 때문에 선포를 코앞에 두고 폐지됐습니다. 2024년 충남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된 것도 비슷한 흐름이었고요. 하지만 제주는 목소리 큰 일부의 반대에 굴복하는 대신 더 많은 설득과 소통에 나섰습니다. 백래시가 잦아들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과정은 헌장에 절차적 정당성을 더해 줬습니다.
답답한 시간만 계속 흘러가던 지난해 8월 말,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제주연구원이 도민 101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도정 성과 도민 인식조사’에서, ‘헌장 내용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65.2%로 반대 응답(17.1%)을 크게 앞지른 겁니다. 큰 목소리로 공론장을 뒤덮었던 보수·극우단체들의 반대 여론이 과다대표됐다는 증거였죠. 헌장 제정을 촉구하는 제주 시민단체와 진보정당의 성명도 그때쯤 연달아 쏟아졌습니다.
마침내 제77주년 세계인권의날인 지난해 12월10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헌장 선포식이 열렸습니다. 이날도 반대 단체들이 행사장에 찾아와 고성을 지르며 반대했지만, 참석자들은 꿋꿋하게 헌장을 선포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이어 가까운 곳에 있는 4·3 위패봉안실을 찾아 4·3사건 희생자들의 이름 앞에 헌장을 바쳤습니다.
지난해 12월10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제주평화인권헌장 선포식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
평화와 인권, 삶 속으로
이번 헌장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차별·인권 관련 연구자인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홍 교수는 이렇게 말했어요.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습니다. 보편적인 인권 관련 내용도 잘 정리돼 있으면서, 환경이나 4·3 같은 지역적 특성도 잘 담겨 있어요. 최근 새로 등장한 의제인 기후위기 관련 내용도 잘 담겼습니다.”
홍성수 교수는 이어 “10여 년 전부터 인권헌장·조례를 방해하는 세력이 큰 압박을 가해 대부분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정이) 시도조차 되지 않거나 시도하더라도 좌절됐다”며 “제주에서도 반대가 적지 않았고 힘든 상황도 있었지만, 굴복하지 않고 헌장을 선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정의 모든 절차에서 인권을 적극 고려하는 ‘인권 주류화’가 필요하다”고도 했어요. 제주도청은 헌장 내용을 정책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주 4·3사건 73주년을 하루 앞둔 2021년 4월2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 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에 동백꽃 조화가 놓여있다. 권도현 기자 |
도민들의 인권 의식도 높아졌습니다. 고채운씨는 도민참여단 활동을 계기로 4·3사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고씨는 따로 시간을 내 4·3사건을 공부한 뒤, 그 주제로 학교 연극부에서 직접 연극을 만들어 공연했습니다. 할머니가 4·3 피해자였던 걸 모르는 중학생이 그때로 돌아가서 그 일을 겪어보는 ‘타임루프물’이었죠. 고씨는 “직접 연기를 하면서 ‘그분들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헌장이 도민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면, 더 많은 이들이 고씨처럼 일상 속에서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겠지요. 다른 곳에서도 이처럼 인권을 보장하는 제도와 규범이 자리잡기를 바라봅니다. 평화와 인권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니지만, 못 올 것도 아니라는 걸 제주가 보여줬듯이 말입니다.
숱한 우여곡절과 고민과 결단 끝에 탄생한 제주평화인권헌장. 사실 짧은 기사에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헌장 제정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낸 스토리텔링 콘텐츠, <경해도, 봄은>을 만들었습니다. 인터뷰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쿠키’ 페이지도 제작했어요. 아래에 링크를 걸어드리니 한 번 읽어봐주세요.
▶ (상)차별도, 소망도…몽땅 담아내쿠다
https://buly.kr/7QNrx0b
▶ (하)4·3의 자녀들이 길을 뚫었다
https://buly.kr/FWUj4Xc
▶ (쿠키)‘경해도 봄은’, 함께 만든 사람들
https://buly.kr/5q92m0l
“하나를 보더라도 입체적으로” 경향신문 뉴스레터 <점선면>의 슬로건입니다. 독자들이 생각해볼 만한 이슈를 점(사실), 선(맥락), 면(관점)으로 분석해 입체적으로 보여드립니다. 매일(월~금) 오전 7시 하루 10분 <점선면>을 읽으면서 ‘생각의 근육’을 키워보세요.
<점선면>의 다른 뉴스레터가 궁금하시다면 구독을 눌러주세요! ▶ https://buly.kr/AEzwP5M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더보기|이 뉴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 점선면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