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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화순서 멈춘 개혁의 꿈…조광조가 마주한 마지막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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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남 열풍 속 다시 찾은 남도 유배지 <2>
기묘사화의 비극이 서린 화순 능주 유허지
절망을 죽음 앞에 초연한 절개로 바꾼 현장
사약 앞에서도 굽히지 않은 청년 선비의 기개

편집자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대한민국에 '유배 문화'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권력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이 마주했던 고립과 절망은 역설적이게도 남도의 너른 품 안에서 위대한 학문과 예술로 승화됐다. 아시아경제 호남취재본부는 영화 속 서사를 넘어 실제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광주·전남의 주요 유배지를 톺아본다. 척박한 땅을 희망의 터전으로 일궈낸 선비 정신과 오늘날 '예향 남도'의 뿌리가 된 유배 문화의 가치를 총 6편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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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위치한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유배지. 민현기 기자


단 한 달이었다. 한양에서 가장 촉망받던 청년 개혁가 정암 조광조가 전남 화순 능주에 도착해 사약을 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권력의 무상함과 몰락한 주인공의 고뇌를 조명하는 가운데, 500여 년 전 실제 '왕의 남자'였던 조광조의 마지막 행적이 재조명받고 있다. 화려한 조정의 중심에서 남도의 작은 초막으로 추락한 개혁가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다.

적막 속에 서린 서늘한 기운…능주 적려유허지의 오후

18일 찾은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마을 길을 따라 들어가면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정암적려유허비(靜庵謫廬遺墟碑)'가 탐방객을 맞이한다. 영화 '왕사남' 속 주인공이 마주했던 고립의 공간처럼, 이곳 역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개혁가의 마지막 장소라고 믿기 힘들 만큼 정적에 휩싸여 있다.

유허지 마당에 올라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소박한 초가 한 채다. 조광조가 유배 생활 한 달여간 머물렀던 적거지를 재현한 공간이다. 비좁은 방 안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은 평화롭지만, 당시 사약을 기다리던 청년 개혁가의 심경을 떠올리면 공간 전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능주 벌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으나,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공기는 사뭇 다르다. 화려한 조정의 중심에서 한순간에 죄인의 몸으로 전락해 이곳에 당도했을 조광조의 고독이 유허지 구석구석에 스며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밟히는 마른 흙 소리만이 500년 전 비극의 역사를 증언하듯 고요하게 울려 퍼진다.

한 달간의 짧은 고립…죽음 앞에 초연했던 선비의 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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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의 정암 조광조 선생의 초상화. 민현기 기자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로 실각한 조광조는 이곳 능주로 유배됐다. 한양에서 촉망받던 서른여덟의 젊은 지성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한 달이었다. 영화 '왕사남'에서 왕의 총애를 잃고 몰락한 주인공의 처지와 조광조의 운명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조광조는 이곳 능주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물품처럼 폐기되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원망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며 담담히 최후를 준비했다. 사약을 받기 직전 그가 남긴 '절명시(絶命詩)'에는 임금을 향한 변치 않는 충심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집안 걱정하듯 하였노라"는 그의 마지막 외침은 오늘날까지도 선비 정신의 정수로 회자된다.

조광조의 유배 생활은 기간으로 보면 짧았으나 그 파급력은 조선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고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결기는 남도 선비 정신의 뿌리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배객과 남도인의 의리…학포 양팽손과의 '지란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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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로 전라남도 화순군으로 유배를 와서 사사를 받아 죽은 조광조 선생 유배지의 애우당 전경. 민현기 기자


화순 능주 유배지가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유배객과 현지인이 나눈 '의리'에 있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숨진 뒤, 조정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도 그의 시신을 몰래 거둔 이는 현지 선비 학포 양팽손이었다.

양팽손은 자신의 고향인 화순으로 내려와 있던 중, 친구였던 조광조의 비보를 듣고 위험을 무릅쓰며 시신을 수습했다. 이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 올바른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남도 사람들의 기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허지 인근에 조성된 두 사람의 인연은 영화 '왕사남' 속 고립된 주인공을 돕는 주변 인물들의 서사처럼 깊은 울림을 준다.

현재 유허지에는 조광조를 기리는 사당인 '문우영당'과 함께 양팽손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권력의 무상함 속에서도 변치 않는 인간적 도리를 보여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유배지를 찾는 이들에게 인문학적 감동을 선사한다.

"역사는 반복된다"…영화 열풍에 다시 찾는 미완의 개혁

유배지 인근의 상인들은 최근 '왕사남' 열풍 이후 화순 능주 조광조 유허지에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탐방객이 크게 늘었다고 입을 모은다. 주말이면 영화 속 비극적 정취를 직접 느끼려는 이들로 활기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만난 탐방객 박 모 씨(32)는 "권력의 정점에서 한순간에 밀려난 조광조의 삶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며 "짧은 유배 기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신념을 배우고 간다"고 말했다.

화순군 관계자는 "조광조의 유배지는 슬픔의 공간이 아닌, 올바른 개혁 정신을 되새기는 교육의 장"이라며 "영화의 흥행이 남도의 품격 있는 역사 자산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호남취재본부 민현기 기자 hyunk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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