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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마르티네즈,폭발하는 색채와 도상을 감춘 미묘한 '화이트아웃'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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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 넓은 갤러리 창밖으로 봄햇살이 드리운 전시장에 알 듯 모를 듯한 화이트의 캔버스가 관객을 맞는다. 꽃병, 인물, 기호 등이 드러나는 것같지만 흰 물감으로 덮이고 지워져 미묘한 층위만 드러난다. 미국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에이 마르티네즈의 '화이트아웃' 기법의 신작들이다.

리안갤러리 대구(대표 안혜령)는 3월 12일 미국 후기 추상표현주의를 리드하는 작가 에디 마르티네즈(Eddie Martinez)의 개인전을 개막했다. 오는 4월 30일까지 한달 반여 열리는 이번 전시에 작가는 요즘 집중적으로 전개하는 화이트아웃(White-Out) 시리즈의 회화 20여 점을 출품했다. 대구 미술팬들에게 선보이는 출품작은 모두 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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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리안갤러리 대구에서 개막한 에디 마르티네즈 전시의 출품작. [이미지=리안갤러리] 2026.03.13 art29@newspim.com


마르티네즈는 드로잉의 즉각성과 회회의 물성을 자유자재로 결합하며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한 작가다. 그의 회화는 그리기와 지우기를 무수히 반복해 완성된다. 화폭에 빠른 속도로 드로잉을 어어간 뒤, 그 선들을 흰색 물감으로 지우고 덮어버린다. 하지만 이 화이트 물감은 실제론 대상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는다. 화이트 물감들 사이로 여전히 대상들은 가시적으로 남아 있고, 언뜻언뜻 형상을 드러낸다.

겹치기와 지우기, 그리고 다시 덧씌우기를 통해 마르티네즈의 화폭은 미묘한 충돌과 다이내믹한 운율, 그리고 세련된 리듬으로 가득차게 된다. 오늘날 뉴욕 미술계가, 아니 글로벌 미술계가 그의 이 오묘하고 비정형적인 회화에 매료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요소들 때문이다.

화이트아웃 시리즈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작가가 오랜 시간 탐구해 온 ʻ그리기와 지우기'라는 행위의 본질을 조명하는 자리다. 작가가 최근들어 푹 빠져 있는 화이트아웃 연작은 그려진 이미지를 지우고 덮는 과정에서 쉽게 인식하기 어려운 형상들이 등장한다. 그 이미지들은 끝내 완결된 형태로 고정되지 않는다. 흰 물감으로 덮이고, 다시 드러나며, 반복적으로 수정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미지들은 생성과 소멸의 미묘한 경계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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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에디 마르티네즈 'Green Orbit'. 2025. 린넨에 아크릴릭, 오일, 스프레이 페인트. 121.9x152.4cm. [이미지=리안갤러리] 2026.03.14 art29@newspim.com


'White-Out'은 문서 위 오류를 지우는 수정액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마르티네즈의 회화에서 ʻ지움'은 단순한 삭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흔적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지움으로써 흔적이 거꾸로 도드라지는 역설이라니. 바로 이 지점이 오늘 그의 회화를 다시금 조명하게 하는 포인트다.

흰 층위 아래에는 여전히 드로잉의 선과 크고 작은 면들이 남아 있고, 덮인 자리는 화면의 리듬과 밀도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이미지를 호출한다. 스프레이, 샤피 마커, 아크릴, 오일, 콜라주 등 다양한 재료가 한 화면 속에 교차하며, 마르티네즈의 회화는 그만의 강렬한 추상표현의 독창성을 드러낸다.

2층 전시장 초입에 걸린 'Lexicons'(서로 다른 언어체계)는 작가의 회화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대형 캔버스임에도 화면은 하나의 확장된 드로잉처럼 작동하며 반복되는 형상과 속도감 넘치는 선, 이를 덮는 흰색의 층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로써 마르티네즈의 화면은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출해 시간과 행위가 겹겹이 축적된 흔적으로 마치 릴리프처럼 제시된다.

작가가 흰색 물감으로 과감하게 지움으로써 공백이나 침묵이 자리잡는 대신, 지워진 자리가 또다른 이미지의 출발점이 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추상과 구상, 드로잉과 회화, 즉흥성과 통제 사이를 오가는 그의 작업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꿈틀대며 펄펄 날아다니는 생명력을 얻고 있다.

그의 작품은 타이틀도 흥미롭다. 그러나 'Freedom Bird', 'White Whale', 'Land Fish', 'Lost Edge'와 같은 제목들은 특정한 서사를 설명하기 보다는 마르티네즈 회화가 머무는 '상태'와 '지점'을 암시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존재들은 날고, 헤엄치고, 궤도를 빙글빙글 돌면서 제자리를 자유롭게 벗어나 있다. 물고기는 비현실적으로 육지 위에 놓이고, 경계는 끝내 흐려지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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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 2026.03.13 art29@newspim.com


이번 전시는 에디 마르티네즈의 회화를 하나의 ʻ과정 중인 사고'로 제안한다. 그의 회화는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완성된 재현이 아니라, 사유가 머물고 이동하는 공간이다. 흰색의 물감층 아래 부유하는 구불구불한 선과 형상들은 완결을 유예한 채, 잠정적인 상태로 지속된다. 따라서 마르티네즈의 화이트아웃 연작은 시각적으로 구현된 어휘이자, 반복되는 사유의 궤도다.

우리의 삶이 완벽한 정답이 없듯이 작가는 자신의 회화를 결과가 아닌 '시간과 행위의 축적'으로 이해하길 바란다. 또한 그의 작품은 작가를 '제스처의 화가'로 규정하기 보다는 드로잉적 사고를 중심에 둔 작가로 위치하게 만든다. 화면 위에 반복되는 덮기와 드러내기의 과정은, 화가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지워두는지에 대한 '열린 질문'이 되고 있다.

미술평론가 유진상 교수(계원예술대학교)는 "마르티네즈의 회화 속에서 모든 대상은 그것들의 원래의 대상으로 돌아가는 중이거나 줄기세포처럼 가능태의 존재들로 뒹굴고 있다. 흰색의 윤곽은 마법적 리얼리즘 안으로 소환된 소멸과 생성의 어스름한 단계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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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에디 마르티네즈 'Lexicons'.2025. 린넨에 아크릴릭, 오일, 스프레이 페인트. 152x182.9cm. [이미지=리안갤러리] 2026.03.13 art29@newspim.com


마르티네즈의 작업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코브라(CoBrA)그룹과 액션 페인팅을 연상케 한다. 한편으로는 필립 거스틴의 말년작업에 나타나는 시니컬하면서도 만화적인 분위기를 떠오르게도 한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그는 미국 내 상반된 지역을 오가며 성장했고, 때로는 1년에 여러차례 여러 도시를 이주하며 매우 팍팍한 시기를 거쳤다. 파편화된 이미지를 등장시켰다 다시 지우고 덮으면서 때론 슬금슬금 드러내기도 하는 그의 회화 패턴은 이같은 유목민적 배경에서 비롯됐다. 성장과정에서 마주친 서로 다른 풍경은 그의 도상 속에 흔적처럼 등장해 반복적으로 변주된다.

작가는 리안갤러리 대구에서의 작품전을 위해 내한해 한국 기자들과 △대담도 나눴다.

△화이트아웃 작업은 어떻게 시작됐나=2015년 뉴욕 전시를 준비하는 중에 나왔다. 화면에 그려놓았던 블랙의 선과 형태 위에, 재탄생의 느낌으로 화이트물감을 덮어가며 지우기와 그리기를 반복했는데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화이트아웃은 삭제 차원에서 덮는 게 아니라 긴장하는 무엇인가가 나오길 바라면서 하는 작업이다.

△화면에 여러 대상의 파편들이 등장하는데 서로 무슨 관계가 있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여러 대상이 유기적으로 얽힌 것이다.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고,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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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 2026.03.13 art29@newspim.com


△가린 부분이 재창조되는 과정에 매력을 느끼는지?=화이트아웃 기법은 변화무쌍하고 어떤 것으로 귀결될지 몰라 설레이며 전율을 느끼게 한다. 화이트로 다 덮는 게 아니라 덮었다가 살렸다가를 거듭한다. 칼라가 나왔다가 다시 숨었다가 하는 식이다. 나는 뉴욕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물론 드 쿠닝, 고르키 등 유럽서 넘어온 작가도 있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는 미국서 시작됐다고 믿는다.

△나비, 꽃병, 강아지를 많이 그렸다. 요즘엔 어떤 사물에 관심을 갖고 있나=우주, 즉 갤럭시 등 최근 관심을 갖는 대상이 있지만 특정해 말하긴 어렵다.

△화이트 사용한지가 10년이 넘었다. 새롭게 발견해내는 화이트의 세계가 있나=뉴욕의 길을 걷다 보면 가로수에 낙서를 해놓은 걸 환경미화원이 와서 덮어버린 장면을 목도한다. 다른 컬러로 덮는데 흥미로왔다. 화이트는 새로운 것을 부여하며 트랜스폼을 할 수 있어 좋다. 때문에 화이트의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끝까지 해보려 한다. 화이트의 한계를 빨리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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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 리안갤러리 대구에서 열리고 있는 에디 마르티네즈 작품전 출품작..2025. 린넨에 아크릴릭, 오일, 스프레이 페인트. [이미지=리안갤러리] 2026.03.13 art29@newspim.com


△화이트로 그려놓은 걸 가릴 때 아쉽지 않나=내 스튜디오에는 색이 엄청나게 있는데 화이트아웃 연작 말고, 블랙아웃도 있다. 본능적으로 작업한다. 덜 지우거나 더 지우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비주얼적으로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걸 할 뿐이다. 내겐 그림 자체가 삶의 전부다. 또 언어학자는 아니지만 언어를 좋아하기 때문에 제목에 신경을 쓴다. 사실 제목에 살짝 기대기도 한다. 좋은 타이틀이 회화를 완성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호크니처럼 아이패드 드로잉을 할 생각은=별로 생각 없다. 간간이 아이패드를 활용하긴 하나 아주 기본적인 것만 하고 있다. 내 작업의 본질은 페인팅이다. 붓을 들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는 게 아주 좋다. 회화는 미래에도 계속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다. 없어진다면 우울할 거다. 사람들은 실제 페인팅을 감상하길 좋아하니까 앞으로도 이어질 거다.

△언제부터 화가의 길을 생각했나=어린 시절 형제자매 없이 살아서 그림 그리기가 유일한 탈출구였다. 삶에 질곡이 많았는데 그래서 드로잉을 아주 많이 했다. 대학도 생각할 것도 없이 미대를 택했다. 중간에 중퇴하긴 했으나 전업작가를 할 수 있는 건 큰 축복이다.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좀 전에 잠깐 짬이 난 순간 종이에 뭘 그리던데=내가 늘 하는 행위다. 사람을 만날 때도 손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가 있다. 어떤 상대는 싫어하기도 한다. 제 2의 본성이다.

▲에디 마르티네즈는 어떤 작가?=에디 마르티네즈(b.1977)는 미국 코네티컷주의 해군기지에서 태어나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국의 예술가다. 구상과 추상, 회화와 드로잉을 넘나들며 특유의 육중하고 역동적인 붓질이 두드러지는 회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수집한 오브제들을 조합해 3차원 구조물도 제작한다. 이를 브론즈로 캐스팅해 회화 속 활달한 형상들을 연상시키는 조각 작업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마르티네즈는 알리슨 M. 진저라스가 기획한 전시로 산마리노공화국을 대표해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했다. 서울의 Space K, 뉴욕 워터밀의 패리시 미술관, 상하이의 유즈미술관, 디트로이트 현대미술관, 뉴욕 브롱크스미술관, 뉴욕 드로잉센터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의 작품은 국제적인 공공 및 사립 컬렉션에 다수 소장돼 있다.

art29@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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