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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기구한 여정 끝에 라가치상… “인생, 정말 굉장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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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 볼로냐 도서전 아동문학상
‘오누이 이야기’의 이억배 작가
자신의 그림책 ‘오누이 이야기’(사계절)가 지난 4일(현지 시각)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아동 문학상인 이탈리아 볼로냐 라가치상 ‘우화와 옛이야기(Fables & Fairy Tales)’ 특별 부문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억배(66) 작가는 “만감이 교차하더라”고 했다.

그가 이 책의 기구한 여정을 돌아보며 본인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의 제목은 ‘어느 그림책의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하여’였다.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느낌이라고 할까? 탈도 많고 사연도 많았던 이 책의 파노라마 같은 ‘인생유전’은 그림책 작가로서 나의 삶이기도 했지만 굴곡 많은 한국 그림책 역사의 일부이기도 했다.”

조선일보

올해 볼로냐 라가치상 ‘우화와 옛이야기’ 대상을 받은 그림책 ‘오누이 이야기’의 한 장면. /사계절


◇“저작권 포기해야 그릴 수 있던 시절”

홍익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작가는 1996년 스무 권짜리 ‘세계의 내 친구’ 전집 그림책 중 한 권으로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처음 출간했다. 촉박하게 주어진 두 달 작업 기간, 온몸에 파스를 붙여가며 하루 12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나온 책은 작가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저작권 일체를 포기하는 ‘저작권 양도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림책에 그림을 그려 밥 먹고 살려면 저작권 포기가 사실상 필수였다”고 했다. 그나마 참여 작가 20명 중 자신과 ‘강아지똥’의 정승각 작가 두 명만 꿋꿋이 요구해 그림 원화를 돌려받았다. 출판사는 ‘다른 작가들에겐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당할 수밖에 없는 ‘을(乙)’의 처지였지만, 처음부터 내 그림만은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전집에 포함된 책은 판권이 팔릴 때마다 출판사를 옮겨 다녔다. 책 품질은 갈수록 엉망이 됐고, 그림이나 작가 이름이 빠지고 덤핑 판매되기도 일쑤였다. 작가는 팔려간 자식 소식을 듣는 아비가 된 참담한 심정으로 책의 기구한 운명을 지켜봐야 했다. 변호사를 고용해 내용 증명도 보내봤지만, 한 번 넘어간 저작권을 되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제대로 된 저작권을 누리지 못했던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이나 만화 ‘검정고무신’ 사건 등이 사회적 관심을 받을 때, 작가는 “동병상련의 심정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저작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출판사들의 태도도 달라졌죠. 아직 완전하다곤 할 수 없지만, 지금 작가들은 최소한 선택이라도 할 수 있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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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배 작가는 “이 책의 기구한 30년 여정도 한국 그림책 역사의 일부”라고 했다. /이억배 작가


◇원화 전시회 뒤 책도 ‘새 생명’ 얻어

작가는 오랜 노력 끝에 일체의 추가적 손해배상 요구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겨우 저작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첫 출간 때 지켜낸 원화로 2016년 경기도 수원에서 첫 전시 ‘이억배 그림책 원화전’을 열었다. 민화풍의 호랑이와 오누이 그림이 각광 받았고, 석 달간 3만명 넘게 관객이 몰렸다.

그림의 가치를 알아본 사계절출판사가 제안해 2020년 ‘오누이 이야기’를 제목으로 책을 새로 펴냈다. 그림은 원화를 사용했지만 나무에서 벌어지는 오누이와 호랑이의 실랑이 장면 등의 느낌을 살린 세로가 긴 판형에, 글도 새로 쓴 완전히 다른 책이다. 작가는 “같은 그림도 어떤 책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뚜렷한 주관과 편집자·디자이너의 안목이 더해지면 전혀 다른 책이 되는 걸 봤다. 놀라운 경험이었다”고 했다.

고향인 경기도 용인 시골 마을, 국민학교 할머니 선생님이 처음 들려주셨을 때부터, 해님 달님이 된 오누이 이야기는 쑥 타는 냄새, 풀벌레 소리, 검푸르고 투명했던 밤하늘의 별과 바람 같은 시골의 자연과 함께 작가를 사로잡았다. 그 이야기가 환갑을 넘긴 뒤에야 제대로 된 그림책으로 만들어지고, 30년의 기구한 여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세계 최고 권위 도서전에서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게 된 셈이다.

수상 소식을 듣고 작가가 떠올린 건 전설적 그림책 작가 퀜틴 블레이크의 책 ‘내 이름은 자가주’의 마지막 대사였다. “인생은 정말 굉장하다니까요!” 작가는 “올해 아흔 되신 어머니를 오늘 찾아뵙고 말씀드리려 한다. 가장 기뻐하실 것”이라며 웃었다.

매년 열리는 세계 최대 어린이책 잔치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은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여한다. 픽션, 논픽션, 오페라 프리마(신인상) 등 주요 부문 외에 특별 부문을 매년 신설하는데, ‘오누이 이야기’가 대상을 받은 ‘우화와 옛이야기’는 올해 신설된 특별 부문이었다. 볼로냐 도서전에는 올해 전체 세계 73국에서 4120여 종의 어린이책이 출품됐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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