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 [쇼박스] |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나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
1457년 조선. 숙부의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 머나먼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로 유배를 떠나는 이홍위. 최고 권력자인 왕에서 하루아침에 군으로 신분이 강등되고 목숨까지 잃게 됐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16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픈 왕으로 기억되는 단종의 이야기입니다.
그로부터 569년이 흐른 지금,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단종을 다시 소환했습니다. 어린 왕 단종과 유배지에서 그를 감시하던 호장 엄흥도를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개봉 31일 차인 7일 기준 누적 관객 수가 1000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전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단종의 서사는 보통 살기가 가득 찬 세조와 약한 어린 왕의 구도로 그려지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다른 방식을 취합니다. 어린 왕과 함께 그간 다뤄지지 않았던 엄흥도를 전면에 내세운 거죠. 세조는 등장조차 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작품들과는 차별점을 갖고 있는 셈인데요. 실제 역사 속에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해졌는지, 영화에 담기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시죠.
11세 즉위·16세 사망…‘비운의 왕’ 단종
단종은 조선 시대 27명의 왕 중 가장 정통성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세종의 적장손이자 문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세손, 세자를 거쳐 왕위에 오른, 그야말로 ‘로열 패밀리’였죠.
하지만 어머니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자마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문종도 즉위 2년 만에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단종은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됩니다. 성년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해 줄 가족이 없었고,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그나마 돌봤으나 힘은 부족했습니다.
형인 문종이나 동생들에 비해 그리 주목받지 않았던 수양대군이 왕권을 넘본 것은 이처럼 어린 조카를 지켜 줄 든든한 울타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종이 살아 있을 때는 살갑게 굴던 그는 형이 죽자 야욕을 드러냈고, 계유정난을 일으킵니다.
단종을 폐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산군으로 신분을 강등하고, 외부와 차단된 산골 마을로 유배를 보낸 뒤 목숨까지 빼앗은 것은 자신이 벌인 쿠테타가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본인이 잘 알았기 때문일 겁니다. 유교 사회에서 특별한 과오가 없는 왕을 끌어내린 사례는 과거의 다른 나라에서는 물론, 그 이후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거든요.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단종의 정통성을 알기에 후환을 미리 차단한 것입니다.
단종 국가표준영정. |
유배 온 어린 왕을 만난 남자, 엄흥도
그렇다면 ‘왕과 사는 남자’의 또 다른 주인공 엄흥도는 누구일까요. 엄흥도는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의 호장(戶長)이었습니다. 호장은 조선 시대 향리직의 우두머리로, 마을의 모든 향리가 수행하던 말단 실무 행정을 총괄하는 사람이죠. 대체로 여러 대에 걸쳐 직이 세습됐고, 엄흥도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호장을 지낸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엄흥도가 먹고 살기 힘든 마을 사람들을 위해 청령포를 유배지로 유치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그려지는데요. 사실 그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등 관에서 편찬한 공식 사료에는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사실 정도만 간략히 기록돼 있고, 두 사람의 만남이나 대화 등 구체적 상황에 대해선 야사나 전설로 내려오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조가 통치하던 당대에는 단종을 역적으로 규정했기에 단종과 관련된 것은 기록은 물론, 언급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엄흥도와 단종의 만남은 후일 엄흥도의 가문 내에서 구전으로 전해집니다. 영월로 유배를 온 단종은 어느 날 사육신들을 만나는 꿈을 꾼 뒤 슬픔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곡소리를 들은 엄흥도는 왕이 계신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 청령포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단종을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눈 그는 이후 매일 단종을 찾아갔습니다. 1900년 엄흥도의 후손 엄주호가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엄흥도 영정. |
단종은 자결했다? 사실 역사 기록은…
‘왕과 사는 남자’에서 관객들을 가장 많이 울리는 클라이맥스 부분은 단종이 죽는 장면입니다. 죽음만큼은 세조의 사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던 단종은 엄흥도에게 자결을 도와 줄 것을 부탁하고, 엄흥도는 고뇌와 슬픔 속에 왕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보냅니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에서 가장 절묘하면서도 상상력이 가장 크게 발휘된 부분인데요. 단종이 어떻게 승하했는지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보니 그 빈칸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가득 채운 것으로 보입니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금성대군과 장인 송현수의 죽음을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魯山聞之, 亦自縊而卒, 以禮葬)”고 나옵니다. 하지만 후대의 실록이나 다른 기록을 보면 이는 세조가 자기 잘못을 덮고 미화하기 위한 기록으로 해석됩니다. 세조가 단종을 죽이도록 명했고, 단종은 결국 타살당했다는 데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이 사약이었는지, 교살이었는지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요. 사약을 거부하거나 효과가 미치지 않아 교살로 죽이는 경우도 있어 단종도 그랬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숙종실록’에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영월에 도착했으나 머뭇거리면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단종을 수행하던 하인이 나서 교살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而其時貢生之常侍於前者, 乃請自當於所不忍處, 便卽九竅流血而斃)”는 것입니다.
‘연려실기술’에는 “단종을 모시던 통인(시중 드는 사람)이 단종을 죽이는 것을 자처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단종이 앉은 자리 뒤로 가서 목에 걸고 창문으로 끈을 잡아당겼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단종이 죽음을 맞는 장면과 비슷한데요. 실제로 영화를 만든 장항준 감독은 이 기록을 참고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엄흥도가 단종의 죽음을 도왔다는 설정은 완전한 허구입니다.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기록만 있고, 실제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통인과는 별개의 인물입니다. 하지만 장 감독은 ‘다른 기록 속의 두 사람이 혹시 같은 인물이라면’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둘을 하나로 합쳤다고 합니다. 그 결과 가장 의지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부탁해야 했던 왕과,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던 사람이면서도 죽음에 이르게 해야 했던 남자의 절절한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쇼박스] |
버려진 단종 시신, 목숨 걸고 수습한 엄흥도
앞서 ‘세조실록’의 주장과는 달리, 후대의 여러 기록에서는 단종이 살해당한 후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연산군일기’에는 “노산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魯山屍身棄于林薄, 旬月無斂者, 烏鳶來喙. 有一童行夜負屍而走, 不知投諸水火)”는 기록이 있습니다. 야사를 모은 ‘아성잡설’이나 ‘축수록’에는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때 엄흥도는 ‘시신을 아무도 거두지 말라’는 명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내 줬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59년 후인 1516년 ‘중종실록’에서입니다. 중종의 어명을 받은 우승지 신상이 영월에서 단종의 무덤을 찾아 제사 지내고 돌아와 결과를 보고하였는데요.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스럽게 여긴다(墓在寧越郡西五里路傍, 高僅二尺, 衆塚蕞于傍. 邑人稱之爲君王墓, 雖孩幼, 亦能識別. 人云: ‘當初不諱之日, 一邑遑遽, 郡吏有名(陰興道)〔嚴興道〕者, 臨哭具棺以葬.’ 邑人至今哀傷之)”고 적혀 있습니다.
조선 후기 ‘현종실록’에서는 “ 노산군이 해를 당했을 때 시신을 거두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 고을의 향리 엄흥도가 곧 가서 곡하고 스스로 관곽을 마련하여 거두어 묻었다(魯山君遇害時 無敢收屍者. 其郡吏嚴興道 卽往哭之. 自備棺槨 收而葬之)”고 언급했습니다.
단종, 241년 만에 복위…엄흥도도 추증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단종의 복위가 이뤄집니다. 서인 세력이 단종의 복권을 주장하면서 1681년 노산대군으로 추봉된 후 1698년 단종으로 복위됐습니다. 단종이 죽은 지 무려 241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단종이 묻힌 영월의 묘도 이때 ‘장릉(莊陵)’이란 능호를 얻었습니다. 엄흥도가 단종을 묻은 자리인데요. 훗날 조정에서 왕릉을 이장하게 위해 지세를 살폈는데, 그 자리가 이미 길지라 이장하지 않고 형태만 격식에 맞게 고쳤다고 합니다. 장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대가로 일가가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며 후손까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세조 치하에서는 죄인이었으나 조선 후기 단종의 복위와 함께 그의 명예도 회복되었습니다. 현종 때 엄흥도의 후손들이 등용되었고, 숙종 때인 1709년엔 사육신이 배향된 영월 창절사에 함께 모셔졌습니다. 1820년(순조 20년) 때 공조참판으로 추증됐고, 1876년(고종 13년)에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까지 받게 됩니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 3대가 멸할 위험을 무릅쓰며 단종에게 예를 다했던 엄흥도의 충절은 늦게나마 결국 인정을 받고 존경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영월 장릉. [국가유산청] |
평생 단종을 그리워한 정순왕후
단종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은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입니다. 단종이 유배를 갈 때 헤어진 정순왕후는 노비로 전락한 채 81세까지 홀로 살며 눈물겨운 삶을 살았습니다.
서울 청계천의 ‘영도교(永渡橋)’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나던 날 정순왕후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곳입니다. 이 다리를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해서 ‘영원히 건너간 다리’라는 뜻의 영도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단종이 떠난 후 정순왕후는 궁에서 쫓겨나 지금의 숭인동 인근 초막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 있는 동쪽(영월 방향)을 바라보며 통곡했고, 그 봉우리에는 ‘동망봉(東望峰)’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죽어서라도 단종 곁에 묻히길 원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기도 남양주에 지친 몸을 뉘었습니다. ‘사릉(思陵)’은 단종을 평생 생각하고 그리워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릉에 있는 소나무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그 방향이 단종이 묻힌 영월 장릉 방향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단종을 지키려던 금성대군·혜빈 양씨의 최후는?
단종을 지키려 했던 3인방, 즉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 등도 모두 세조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금성대군은 계유정난 이후 모반 혐의로 여러 곳에 유배된 후 영월과 멀지 않은 순흥에 안치됐는데요. 영화의 내용처럼 그곳에서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했으나 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밀고로 인해 세조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결국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도 “내 임금은 북쪽에 계신다”며 세조가 있는 한양이 아니라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는 민담이 내려옵니다.
세조의 숙청 과정에서 일어난 정축지변은 끔찍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군사들이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해 30리 안에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고 전해집니다. 참수당한 사람들의 피가 죽계를 따라 10여 리나 흘러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로, ‘피끝마을’로 불리고 있습니다.
혜빈 양씨는 자식들과 함께 유배된 후 교수형에 처했는데요. 경혜공주 역시 남편을 잃고 비구니가 된 후 가난한 삶을 살다 생을 마감합니다.
세조 어진 초본. [국립고궁박물관] |
단종을 밀어낸 이들은 행복했을까.
이 모든 일의 원인인 세조의 삶은 어땠을까요. 자신의 욕망을 마침내 이뤄냈다는 만족감에 행복했을까요.
사실 세조는 단종을 폐위시킨 후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유령에 시달리며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말년에는 극심한 피부병을 앓았는데, 꿈속에서 현덕왕후가 뱉은 침을 맞은 자리를 시작으로 온몸에 종기가 생겼다는 설화도 있습니다.
세조가 죽은 후 아들 예종은 18세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습니다. 하지만 불과 1년여 만에 지병으로 사망하게 되죠. 인종 전까지는 가장 짧은 재위 기간 기록입니다. 조선의 왕들 중 20세가 되기 전에 요절한 왕은 단종과 예종 두 명뿐이라는 점도 기묘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아버지의 업보와 사촌의 원혼 때문이라는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입니다.
계유정난 이후 권력을 잡은 간신 한명회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폐출을 주도했고, 이로 인해 사망 17년 뒤인 갑자사화 때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의 목이 베어져 거리에 내걸리는 부관참시를 당하게 됩니다.
별점과 추모제…역사의 심판은 계속된다
‘왕과 사는 남자’ 개봉 후 단종의 능인 장릉과 영월 청령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애도의 뜻을 담아 높은 별점이 매겨지고 있는데요. 영월에서는 ‘단종로’라는 이름의 거리를 조성하고, 매년 단종문화제와 사육신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서점가에서는 때아닌 ‘조선왕조실록’의 인기가 높아졌고, 이광수가 1928~1929년에 쓴 소설 ‘단종애사’도 출간됐습니다.
반면 세조와 한명회를 기리는 행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조의 능인 광릉과 한명회의 묘에는 별점 테러와 악플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도 역사의 심판은 언젠가는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단종이 영월에서 자신의 처지를 자규(소쩍새)에 비유에 지은 시를 보며 어린 왕을 애도해 봅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궐에서 나온 뒤로(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외딴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孤身隻影碧山中)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들 길 없고(假眠夜夜眠無假)
해마다 한을 끝내려 하나 끝없는 한이네(窮恨年年恨不窮)
산봉우리에 울음소리 끊어지니 새벽달이 비추고(聲斷曉岑殘月白)
봄 골짜기에 피 흐르니 붉은 꽃이 떨어진다(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 먹어서 하소연 못 듣는데(天聾尙未聞哀訴)
서러운 몸 어쩌다 귀만 홀로 밝은가(何奈愁人耳獨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