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도 오라클, SAS, 딜로이트, 언스트앤영(EY) 같은 화려한 이름을 등에 업고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53세에 이들을 뒤로 하고 자기 이름 ‘장동인’으로 살기 시작했다. 창업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인생 2막 시작이었다.
장동인 박사가 서울 강서구 마곡동 소재 공유 오피스 내 1평 크기의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 화려한 퇴장과 쓰라린 실패
장 박사가 정보통신(IT) 컨설팅 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 기업들은 부서마다 따로 돌아가던 전산 시스템을 통합하는 정보 고도화와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오라클, SAS 같은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이 수요를 겨냥한 서비스를 앞다퉈 선보이며 영업과 세일즈 담당 인재를 끌어모았다.
그 무렵 장 박사는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졸업한 뒤 특별한 계획 없이 미국으로 건너간 상태였다. 세븐일레븐 편의점과 주유소 새벽 근무로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목사, 치기공사, 미군 입대까지 뒤죽박죽 선택지를 두고 갈팡질팡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IT 직업훈련기관 CLC(Computer Learning Center)였다. 반신반의하며 시작한 공부였지만 코드를 짜는 동안 직감했다. “이게 내 일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CLC를 졸업한 그는 28세에 비자카드 프로그래머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아메리칸항공, 오라클 본사 및 오라클 코리아로 옮겨 다니며 승승장구했다. 1996년 오라클 코리아에 다닐 때 40세 장 박사는 연봉 1억 원에 사택과 차량까지 지원받았다. 근로자 가구 연평균 소득이 2500만 원이던 시절이다.
화려한 조직 생활은 EY 컨설팅 본부장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나이가 많아서 잘린 것”이었다. 그는 53세였다. 약 1년의 공백기 후 그는 ‘미래읽기 컨설팅’이라는 간판으로 창업했다. 클라우드 컴퓨팅 컨설팅이 주력으로 한때 직원을 10명까지 늘리며 사세를 키워 나갔다. 그러나 5년을 채 버티지 못했다. 이유는 뜻밖에도 단순했다. 힘들게 따낸 프로젝트를 맡긴 핵심 직원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기며 잠수를 타 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그제야 깨달았다. 오라클, 딜로이트, EY라는 간판이 얼마나 강력한 채용 무기였는지와 자기 간판만으로는 믿을 만한 사람 하나 곁에 두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현실을.
“대형 조직에서 몸에 밴 방식, 남들이 하던 방식 그대로 창업을 하니 잘 될 리가 없었어요. 직원을 최소화하고 혼자 움직이는 솔로프리너(혼자·solo와 기업가·entrepreneur의 합성어, 1인 기업가)가 제 상황과 성격에 적합하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과거 성공 방식이 50대 이후 삶을 그릴 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큰 대가를 치르며 배웠다. 쓰디쓴 실패가 도리어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KAIST 김재철AI대학원 CAIO(Chief AI Officer) 과정 졸업생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열린 글로벌 AI 컨퍼런스 NVIDIA GTC 2025를 참관 중인 장동인 박사(왼쪽) |
● 60세에 도전한 박사 학위
컨설팅 회사를 접은 뒤 2015년부터 3년간 국방과학연구소(ADD) 빅데이터 및 AI 과제 프로젝트 매니저(PM)로 일했다. 당시 빅데이터 전문가 협의회장이던 그에게 ADD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공공기관 특유의 빡빡한 보고 체계와 행정 절차가 성미에 맞지 않기도 했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남았다.
그 무렵 눈에 들어온 것이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 경영학 박사 과정이었다. 단순히 학위를 따겠다는 생각만은 아니었다. 30년 넘게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하나의 체계적인 이론과 프레임워크로 정리하고 싶었다. 기술과 경영이 맞닿는 지점에서 ‘실체 있는 전략’을 학문적으로 완성하며 커리어의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박사 과정이라니. “그걸 따서 뭐에 쓰려고?”라는 말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그때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공부해서 뭐하냐? 더구나 나이 들어서? 산에 올라가서 뭐하냐? 내려올 건데. 목적지향적 마인드. 왜 공부하는 것을 즐기지 못할까? 학위, 취업, 돈… 꼭 그것만 생각할까? 공부한다는 것은 나를 하나씩 알아가는 것. 지금도 나를 혁신해 가고 바꾸어 가려는 것, 그 속에서 알아가는 즐거움. (중략) 산에 갈 때 얼마나 빨리, 얼마나 멀리 가느냐만 따지지 마라.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산은 마음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없는 이에게 산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약 2년의 시간과 4000만 원의 학비를 투자한 끝에 그는 박사 학위를 손에 쥐었다. aSSIST는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등재 학술지에 논문 3편을 게재하면 박사 학위 졸업 논문 자격을 주는데, 그는 수업과 논문을 병행하며 초단기로 과정을 마쳤다.
이 학위가 예상치 못한 문을 열어줬다. KAIST 김재철AI대학원이 물색하던 CAIO 비학위 과정 주임교수 자리에 후배 소개로 그가 가게 된 것이다. “박사 학위가 어떤 자리를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KAIST 교육자이자 사고 리더(Thought Leader·특정 분야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 개인)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실력과 인연이 만나는 순간 미리 갖춰 둔 자격이 결정적인 문을 열어준 것이다.
● 나이 들수록 강해지는 ‘나’라는 브랜드
70세임에도 장 박사는 여전히 현역이다. 그의 롱런 비결은 퍼스널 브랜딩에 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춰 그가 조언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는지 파악해 그 영역에서 1등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몰입하라. 강의 기회가 생기면 서슴없이 가고, 꾸준히 책을 쓰는 것도 자기 브랜드 구축에 큰 도움이 된다.
전문직일수록 흐름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도 그의 지론이다. 그러려면 배움을 멈춰선 안 된다. 아들딸뻘 강사를 찾아가는 일도 그에겐 자연스럽다.
“유튜버 ‘테디’에게 구글 텐서플로(구글 오픈소스 AI 플랫폼) 자격증 시험 준비를 배웠어요. 내 큰아들보다 한 살 많은데, 내가 열심히 따라가니 그 친구도 신기해 하더라고요.”
배움의 자리에서 나이와 체면을 내려놓고 기술 트렌드를 공부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인사이트를 공유하는 것, 그가 현역을 지속하는 힘이다.
또 하나의 조언은 ‘연결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전문가란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가진 사람이다. 자신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일거리와 아이디어를 이어주는 허브 역할을 하는 것이 자기 가치를 높이는 비결이라는 얘기다. “후배들에게 잘 하라”는 조언도 이런 맥락에서다. 지금 잘 대해 준 후배가 훗날 고객이 되고 소개자가 되고 협력자가 된다.
그는 지금을 ‘1만 명의 오디언스(청중)’만 있으면 충분한 시대라고 본다. 명단에 숫자로 적힌 사람들이 아니라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든 전화를 걸든 실제로 소통하는 1만 명이면 먹고사는 데 지장 없다는 뜻이다.
“1만 명의 오디언스를 확보했다면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조언에 그의 수십 년 커리어 철학이 압축돼 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은 정신 나간 소리”라며 “한 사람이라도 박수 치고 있는 한 떠나지 않겠다”는 개그맨 이경규 말에 그는 깊이 공감한다고 했다.
은퇴를 강요받는 시대에 장 박사는 스스로 무대를 만들어 계속 서 있다. 1평짜리 사무실이지만 그의 무대는 넓다.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걸어가는 것 자체를 사는 사람,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것을 브랜드로 만들며 관계를 꾸준히 쌓아 온 사람에게 은퇴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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