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년 2월 23일은 영국 하원에서 노예 무역 금지 법안("Slave Trade Abolition Bill")이 통과된 역사적인 날로 기록되고 있다. 이 날이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세계 최초로 노예 무역 금지가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이 법안은 1780년대 말부터 꾸준하게 형성된 폐지 운동이 의회 안으로 들어와 반복적으로 반대 논리와 이해관계가 부딪치며, 마침내 대논쟁의 종지부를 찍은 날이기도 하다.
이 논쟁의 출발점은 한 의원의 연설에서 시작된다. 1789년 5월 12일,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의원은 하원 연설에서 쇠사슬에 묶여 노를 젓다가 병에 걸려 쓸모가 없어지면 바다에 비참하게 내던져지는 노예들의 실상을 4시간에 걸쳐 열변을 토했다. 요안 그리피드(Ioan Gruffudd)가 주인공으로 열연한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2006)에서 보여준 윌버포스의 연설은 단지 감성적 호소가 아니라, 무역선 선원 출신들의 증언에 근거한 사실에 근거한 보기 드문 영국의 명연설로 꼽힌다.
1807년 영국 의회를 통과하며 대서양 노예 무역을 법적으로 금지한 '노예 무역 폐지법(Slave Trade Act 1807)'의 공식 문서. [사진=영국 국립기록보존소(The National Archives, UK) / Public Domain] |
하지만 역사학자 에릭 윌리엄스(Eric Williams)가 쓴 자본과 노예(Capitalism and Slavery, 1944), 그리고 18세기 영국 의회 보고서(Parliamentary Papers)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런던, 리버풀, 브리스톨 등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던 도시 인구의 8분의 1 이상이 노예 무역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야유를 보내며 반대하는 도시 자본가와 지주, 그리고 귀족 의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1807년 2월 23일 웨스트민스터 하원 회의록은 이 역사적 현장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노예 무역 폐지 법안("Slave Trade Abolition Bill")의 찬반 측은 두 축으로 나뉜다. 한편에는 법안을 지지하는 정부 소속 의원들이고, 반대편에는 식민지 이해관계와 경제적 충격을 근거로 반대하거나 신중론을 펼치는 야당 소속 의원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당대의 정당 구도는 오늘날처럼 양당 제도로 고정된 형태라기보다 휘그(Whig)와 토리(Tory)의 전통적 균열선과 개인적 연합, 정부 구성의 다양한 변화가 섞여 있는 형태였다. 그럼에도 대체적인 흐름에서 법안을 적극적으로 끌고 간 쪽은 휘그 계열 정부를 중심으로 한 폐지파였고, 반대 측은 서인도 플랜테이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보수적 의원들과 경제적 충격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 역사적 토론은 로드 하윅(Lord Howick) 당시 휘그(Whig) 당 소속 의원의 반대 연설로 시작된다. 그는 18년이나 된 핵심 법안임을 지적하며 찬성을 표명한다.
"노예 무역 금지에 관한 법안은 이미 오랫동안 충분히 논의되었다"("This question has been so long and so fully discussed…")
이 한 문장은 그날 토론의 성격을 명확히 정리해 준다. 매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재상정되는 이유는 의제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며, 이제는 결론을 내야 할 때가 왔다는 압력인 셈이다. 또한 노예 무역이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노예 무역은 원칙에 있어 부정의하며, 둘째, 결과에 있어 정책적으로도 잘못되었다"("The trade is unjust in its principle, impolitic in its effects")
이 대목에서 "정책적이다 잘못되다"(impolitic)는 표현은, 찬성파가 단순히 도덕을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장기적 이익과 통치의 정당성까지 함께 문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석에서는 곧바로 "옳소!"(Hear, hear) 같은 반응이 따랐다.
1787년 조시아 웨지우드가 제작한 노예제 폐지 운동의 상징적 메달리온. "나는 사람이 아니며 형제가 아닙니까?(Am I Not a Man and a Brother?)"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사진=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 소장 / Public Domain] |
한사드는 이렇게 회의장의 분위기를 장황하게 묘사하지는 않지만, 이런 짧은 표현을 통해 발언의 어느 지점에서 동의가 이루어지는지, 어떤 말에서 의사당 내 소란이 일어나는지, 의장은 어떻게 의사 절차를 관리하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반대 진영은 즉시 '재산'과 '보상'의 문제를 들며 반론을 펼친다. 노예 무역이 부정의하다는 주장 자체를 정면으로 옹호하기보다, 의회가 법으로 금지 조치를 취할 때 그 결과가 경제와 식민지 질서에 미칠 충격을 묻는 방식이다.
"서인도 제도 소유자들의 재산이 이 법안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The property of the West India planters is deeply involved in this measure")
같은 문장이 나오는 것이 바로 그런 맥락이다. 다른 논거도 등장한다.
"보상 없이 이처럼 중대한 이해관계를 희생하는 것이 과연 정의인가?"("Is it just to sacrifice so great an interest without compensation?")
이 질문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의 호소라기보다, 당시 영국 정치에서 재산권이 헌정 질서의 중요한 축으로 이해되던 관념을 겨냥한다. 법이 도덕을 구현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이 재산권과 계약의 세계를 어떻게 흔드는지, 의회는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묻는 셈이다.
이런 발언에 대해 일부 의석에서 다시 "옳소!"(Hear!)로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한사드가 모든 발언을 아주 세밀하게 그려주지는 않지만, 때때로 발언 방해(interruption) 같은 표기가 등장하는 지점은 논쟁이 과열되었음을 시사한다.
토론이 과열되거나 서로 고함으로 의사당이 소란할 때, 한사드 기록에는 의장의 역할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질서!"(Order!)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의장은 토론의 방향에 개입하기보다, 발언 순서와 표현의 한계를 결정하고, 논쟁이 절차를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1807년 논쟁에서도 의장은 때때로 "질서!"를 선언하며 의원들이 상대방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때 장내를 한 순간에 제압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한사드의 "질서!"가 어떤 소설적 분위기 묘사를 대신하는 도구로 기능한다는 사실이다. 의장이 "질서!"를 말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때 회의장의 소란과 긴장을 암시한다.
윌버포스는 이 논쟁의 상징적 인물이며, 1807년 토론에서도 중요한 목소리로 등장한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노예 무역의 문제를 제기해 왔기 때문이다. 1789년의 4시간에 걸친 의회 연설 이후, 그는 회기가 열릴 때마다 이 문제를 의회가 잊지 않도록 다시 상정했고, 그 과정에서 '노예 무역'은 더는 일부 인도주의자의 관심사가 아니라 국가의 원칙과 명예를 건드리는 공적 쟁점이 되었다.
1807년의 토론에서 그가 던지는 문장은,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는 방식이라기보다, 이미 알려진 사실 위에서 의회의 우선순위를 재정렬하는 방식에 가깝다.
"우리는 재산에 대해서는 충분히 들었다. 이제 정의에 대해서도 들어야 한다"("We have heard much of property; let us hear something of justice")
이 발언이 나오는 순간 의석에서는 "옳소!"(Hear, hear)로 응수한다. 이는 도덕과 정의의 언어가 단지 감상적 호소가 아니라 의회 다수의 공감을 얻는 정치적 문장으로 자리 잡았음을 시사한다.
이 지점에서 반론 측의 골격이 보다 선명해진다. 반대 측은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면 제국의 안보와 질서가 위험해진다는 논거를 제시한다.
"갑작스러운 폐지는 식민지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The sudden abolition may produce the most fatal consequences in the colonies")
찬성 측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국가가 원칙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맞선다.
이때 찬성 측은 노예 무역을 영국의 '명예'와 연결한다. 영국이 국제 무대에서 자부해 온 문명과 법치의 기준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 없다는 주장이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진=Wikimedia Commons / Library of Congress (Public Domain)] |
또 하나의 흥미로운 대목은, 찬반이 단순히 두 덩어리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원들은 노예 무역을 끝내야 한다는 원칙에는 동의하면서도, "전환의 속도와 방식"을 문제삼는다. 급격한 단절이 오히려 더 큰 혼란과 비극을 낳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신중론은 찬성파 내부에서 정책 설계의 상세한 내용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을 촉발한다. 이때 토론은 "폐지냐 유지냐"의 단순 대결을 넘어, "어떤 방식으로 폐지할 것인가"라는 실행의 언어로 이동한다. 한사드가 기록하는 영국 의회 토론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립이 있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인신 공격이나 허수아비 공격(상대방의 주장하는 논점보다 비약하거나 결론을 오도하여 공격하는 오류; 예를 들어 '나는 여름비가 좋아'라고 이야기하는 아이에게, '비가 너무 와 홍수가 나면 어떻게 하니?'라는 엉뚱한 공격을 하는 모순) 등으로 흐르지 않고, 두 개의 논거가 경쟁하는 형태로 토론이 유지된다.
토론 중에는 종교적 언급이 오가기도 한다. 누군가 성서(Scripture)를 근거로 예속 상태의 존재를 언급하며 논점을 흐리려 할 때, 찬성 측은 "어떤 권위도 불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No authority can sanctify injustice")와 같은 방식으로 되받아치기도 한다.
이때 의장은 다시 "질서!"(Order)를 선언하며, 논쟁이 과도한 감정적 대립이나 비의회적 표현으로 번지는 것을 제어한다. 이런 장면은 웨스트민스터 토론 문화의 핵심을 보여준다. 격렬한 가치 충돌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충돌이 절차를 깨뜨릴 때마다 의장이 재빠르게 개입해 논쟁을 다시 '발언 가능한 형태'로 되돌린다.
1807년 논쟁의 결말은 결국 표결로 완결되었다. 논쟁이 충분히 이어졌다고 판단되면, 누군가 "표결하라!"("Divide!")를 외친다. 여기서 "표결"(Division)은 단순한 기술적 절차가 아니라, 의회가 긴 논쟁을 '결정'으로 전환하는 장치다.
논쟁의 마지막 단계는 본회의 투표 절차다. 그날 결과는 찬성 283표("Ayes 283"), 반대 16표("Noes 16")로 267표("Majority 267") 차이로 노예 무역의 금지가 선포되었다. 이 압도적 표 차는 18년 동안 이어진 논쟁의 흐름을 반영한다. 반대 의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결정을 늦출 만큼의 정치적 힘을 갖기 어려운 국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독자가 놓치기 쉬운 의미가 하나 있다. 한사드는 회의장의 분위기를 문학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누가 격앙되었다" "회의장이 얼어붙었다" 와 같은 문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한사드의 방식은 다른 종류의 '현장성'을 남긴다.
어느 발언 뒤에 "옳소!"(Hear, hear)가 붙었는지, 어디에서 "발언 방해"(Interruption)가 발생했는지, 의장이 몇 차례 "질서!"(Order)를 외쳤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표결"(Division)로 결론이 내려졌는지 등이 상세히 기록된다.
이 같은 표기들이 모여, 의회가 갈등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설득이 어떻게 절차와 결합해 결정을 만들어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1807년의 사례는 오랜 시간 반복된 쟁점이, 마침내 표결로 마무리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 장면이다. 여론, 도덕적 언어, 정책적 계산, 재산권 논리, 제국의 안정이라는 서로 다른 논거들이 한 공간에서 부딪치고도, 최종적으로는 절차의 문장 종결의 표현인 "표결하라!"(Divide!)에 양측이 동의해 표결로 이어진다.
영국 한사드(Hansard) [사진 = © UK Parliament (Open Parliament Licence)] |
1807년 2월 23일의 토론을 한사드 제1 시리즈의 대표 논쟁으로 읽어야 할 이유는 단지 역사적 법안을 둘러싼 논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토론은 웨스트민스터 의회가 사회 갈등을 공론장으로 수렴하고, 입론과 반박의 근거를 기록으로 남기며, 최종적으로 표결로 결정을 확정하는 민주적 정수를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는 위기의 순간에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 무역 금지라는 결론 자체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즉 수십 명의 의원들이 번갈아 가며 입론과 반론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논쟁이 과열될 때 의장이 절차를 통제하며, 찬반의 논거가 정책과 원칙의 언어로 정리되는 과정, 이 모든 절차가 의회 토론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1807년의 표결 숫자는 그래서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오랜 정치적 논쟁이 의회 절차 속에서 역사적 합의로 전환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 시기 영국은 프랑스 혁명과 전쟁이라는 외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정부와 다수 의원들은 대륙 전쟁이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식민지 경제를 급격히 흔드는 결정을 주저했다. 그러나 노예 무역에 대한 비판은 점차 의회 바깥의 시민사회와 결합하며 압력을 키워 갔다. 청원 운동이 확대되었고, 종교 단체와 인도주의적 단체가 자료와 증거를 축적해 나갔다.
의회 토론은 이러한 외부의 문제 제기를 의회로 수렴하며, 점차 논거를 정교화했다. 즉각적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논쟁은 사라지지 않았고, 반복되는 회기 속에서 하나의 지속적 의제로 자리 잡았다. 이 같은 노력이 끊이지 않았기에 1807년의 토론에서 찬성세력은 마지막 논쟁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하원에서 법안이 통과된 이후, 상원(House of Lords)에서 다시 한 번 더 논쟁이 맞붙었다. 하지만 하원에서 형성된 압도적 흐름을 뒤집을 만큼의 반대 세력은 형성되지 않았다. 상원 내부에서도 도덕적 책임과 국가의 명예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후일담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원의 토론과 표결, 상원 심의와 왕실 재가라는 헌정 절차를 거쳐 제도적 현실로 이어졌다.
설득은 말로 끝나지 않고 법으로 정착되었다. 한사드에 남은 토론의 기록은 그 과정을 증언한다. "옳소!"(Hear, hear)와 "질서!"(Order), 그리고 "표결하라!"("Divide!")라는 짧은 표기들은, 격렬한 논쟁이 결국 절차 속에서 정리되고 제도화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교 교수 [사진=뉴스핌 DB] |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저작권자(c) 글로벌리더의 지름길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Newspim),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