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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를 “급진적”이라던 남자, 지금은 왜 그를 지키나 [미국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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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무역 보수 경제학자 해싯의 변신
차트 정치와 트럼프식 경제 메시지
연준 독립성 우려 속 차기 의장 거론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당신들의 주장은 틀렸습니다. 10년 뒤, 누가 맞는지 내기를 합시다.”

1999년 가을, ‘다우 36000’이라는 책이 월가를 흥분시키던 때였다. 저자들은 자신 있게 말했다. “주식은 아직도 싸다. 10년 안에 다우는 3만6000까지 간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스톡턴에 살던 한 변호사, 더그 밴 샌트는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애틀랜틱 지면에 편지를 보내 단호하게 반박했다.

“10년 뒤에도 다우는 3만6000이 아니라, 지금의 1만1000에 더 가까울 겁니다.”

저자들은 즉시 맞받았다.
“좋습니다. 10년 뒤 당신 말이 맞으면, 우리 둘이 각자 1000달러씩 당신이 고른 자선단체에 기부하겠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뒤. 다우지수는 1만대에 머물렀고, 밴 샌트는 오래된 약속을 꺼내 들었다.
“이제, 지불할 시간입니다.”

결국 두 저자는 구세군 앞으로 2000달러를 송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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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백악관 집무실(오벌 오피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발언하는 가운데, 케빈 해싯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귀 기울이고 있다. 사진=AP연합


10년 내기로 증명된 ‘직관의 경제학’


두 저자 중 한 명이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담당해온 해싯은 차기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후보군으로도 꾸준히 거론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해싯을 신뢰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해싯은 복잡한 경제학을 직관적으로 ‘번역’해내는 능력이 있다. 어려운 경제 문제를 정치 슬로건처럼 간단하게 정리하고, 논쟁의 핵심을 한 줄로 요약한다. 어렵고 복잡한 설명을 싫어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맞춤형이다.

특히 해싯의 무기는 차트다. 그는 경제를 ‘말’로 설득하기보다 ‘그림’으로 보여준다.

2018년 9월 백악관 브리핑룸에서도 그는 “늘 하듯이 슬라이드 몇 장을 보여주겠다”며 직접 차트를 띄웠고, 첫 화면에는 소기업 낙관지수를 올렸다. 경제를 의견이 아니라 데이터로 설명하겠다는 방식이었다.

2017년 10월 상원 청문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래프 두 개를 보여드리겠다”며 각국 법인세율 변화와 규제 완화 흐름을 한 장씩 제시했다. 복잡한 논쟁을 단숨에 이해되는 선과 숫자로 바꾸는 능력, 그것이 트럼프가 해싯을 좋아하는 이유로 꼽힌다.

포토맥 리버 캐피털의 최고투자책임자(CIO) 마크 스핀델은 뉴욕타임스(NYT)에 “해싯은 트럼프식 난해한 말을 강력하고 일관된 경제학으로 번역하는 독특한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폭스뉴스 역시 해싯이 “트럼프가 말하는 경제 성과는 데이터에 있다”는 식으로 메시지 번역자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전했다.

자유무역 보수에서 워싱턴 정통 경제학자로


해싯의 출발점은 ‘보수 정통’ 경제학자였다. 그는 1990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뒤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했고, 연준에서도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97년부터는 미국기업연구소(AEI)에서 일했다. AEI는 워싱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싱크탱크로 꼽힌다.

그는 2000년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대선 캠페인에서 수석 경제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밋 롬니 후보 대선 캠페인에서도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대부분의 보수 경제학자가 그렇듯 해싯 역시 자유무역주의자였다. 이민 확대도 옹호했다. 부시와 오바마 재임 기간 해싯은 대폭적인 재정적자 감축을 요구했고 세계 무역 체제를 옹호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미국의 이민자 수용 규모를 2배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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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케빈 해싯 백악관 선임고문이 발언하는 동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다른 참석자들이 이를 듣고 있다. 사진=AP뉴시스


“너무 급진적”…트럼프를 비판했던 해싯


이 같은 학문적 배경은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해싯은 한때 트럼프 대통령에 비판적이었다.

2011년 트럼프가 대선 출마를 고려하던 시기, 해싯은 블룸버그 칼럼을 통해 트럼프의 정책 구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트럼프의 정책 구상이 공화당에게도 “너무 급진적”이라고 지적했다. 해싯은 “트럼프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이뤄낸 놀라운 이력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대통령 출마를 고려한다면 보수층이 자신의 과거를 잊도록 설득할 수 있는지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세금 정책에 대해서도 날선 반응을 보였다. 해싯은 “그는 여전히 세금 정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며 “그의 구상은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를 떠올리게 한다”고 경고했다.

초당적 환영 속 백악관 입성


해싯이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으로 임명됐을 당시 학계와 경제계는 환영했다. 진영을 넘어선 지지를 받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해싯 임명 지지서한에 서명한 대표적인 인물에는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 앨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교수, 그레그 맨큐 하버드대 교수, 제이슨 퍼먼 전 오바마 백악관 CEA 의장 등이 포함됐다.

지지서한은 해싯을 두고 “연준과 재무부 경력을 포함한 경험, 이념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해싯은 워싱턴의 주요 싱크탱크 소속 경제학자들과도 긴밀히 협력해 왔다. 2012년에는 워싱턴의 진보 성향 싱크탱크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딘 베이커와 함께 뉴욕타임스에 ‘실업이라는 인류의 재앙’을 주제로 공동 기고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 같은 경력과 성품은 해싯이 트럼프 행정부의 급진적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키웠다.

반면 트럼프 지지층은 해싯 임명에 반대했다. “이민이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는 해싯의 입장이, 불법 이민자 추방과 국경 장벽 건설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트럼프의 노선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수석 정치전략가였던 스티브 배넌이 운영했던 브라이트바트는 당시 “해싯 임명은 공화당 내 ‘기업 우선주의’ 세력이 ‘미국 우선주의’ 세력을 밀어내고 있다”고 전했다.

9개월 만의 복귀…그때부터 달라졌다


해싯은 2017년부터 2년간 CEA 위원장을 지낸 뒤 백악관을 떠났다. 애틀랜틱은 그가 처음 2년 동안은 공개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적으로는 이민·무역 정책에서는 기존 입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CEA 위원장에서 물러날 당시 논란이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은 “임기가 2년이어서 떠난 것”이라고 공식 설명했지만, 중국·멕시코 등에 대한 관세 부과로 무역전쟁 전운이 감돌던 시기에 석연치 않게 사실상 해임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해싯은 9개월 만에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자문역으로 다시 복귀했다. 이 시점부터 해싯의 행보는 달라졌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해싯의 임명을 지지했던 일부 경제학자들은 트럼프 1기 이후 해싯의 달라진 태도에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해싯은 몇 차례 논쟁의 중심에 섰다.

2020년 코로나19 초기, 해싯은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추이를 분석하며 2020년 5월부터 일일 사망자가 사실상 ‘0’에 근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다수의 전문 예측은 사망자 증가세가 쉽게 꺾이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어 해싯의 전망은 역학 모델과 정면으로 엇갈린다는 지적이 나왔다.

통계학자와 전문가들은 이를 “정크 사이언스”라고 비판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해싯은 해당 분석이 미래 예측 모델이라기보다는 변동성이 큰 데이터를 보기 좋게 만든 ‘시각화’에 가깝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무역·연준 논쟁…경제학계와 충돌


최근에도 논란은 이어졌다. 지난해 3월 그는 ABC 방송에 출연해 미국 내 생산품이 미국인의 복지를 증진시킨다는 것은 경제학의 기본 상식이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이에 그레그 맨큐 하버드대 교수는 “무역 제한은 GDP를 증가시키지 않는다”며 “트럼프의 무역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경제학 개론을 들먹이는 것을 그만두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7월에는 연준 본부 리모델링 비용 초과가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해임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연준이 이 문제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 많다”고 말했다.

8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리사 쿡 연준 이사를 상대로 제기한 주택담보대출 관련 의혹을 “심각하다”고 평가하며 해임 사유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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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리프트’가 드러낸 충성의 논리


해싯의 이런 태도 변화는 그가 트럼프의 ‘충성파 테스트’를 사실상 통과했다는 평가로 이어졌다. 해싯 역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해싯은 2021년 11월 ‘더 드리프트(The Drift)’를 발간했다. 트럼프가 2024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확실한 선두주자가 되기 전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끝났다”고 인정하면서도 동료 공화당원들에게 그의 정신을 이어갈 것을 촉구했다.

또 트럼프를 지지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그의 공개적 이미지, 내가 기억하는 어떤 정치인보다 무례한 그 사람에 대해 경계심을 가졌다. 하지만 내가 그를 지지한 이유는 트럼프가 정치인과 엘리트들이 외면하는 진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조 바이든이나 힐러리 클린턴과의 단순한 싸움보다 훨씬 더 큰 역사적 투쟁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로의 흐름을 막고 되돌리겠다는 결심으로 권력을 잡았다.”

“도널드 트럼프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는 그를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미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좌파의 시도에 강력하게 맞서는 인물로 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차기 연준 의장설…시장 불안 vs 백악관의 기대


해싯은 차기 연준 의장 후보군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비판하며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1년 넘게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해싯 역시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월가와 학계에서는 연준의 독립성을 고려할 때 해싯을 경계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실제 지난해 11월 해싯이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는 보도가 나오자 미국 장기 국채 금리는 상승했고, 채권 투자자들은 그의 임명 가능성에 우려를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일부에서는 해싯의 임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긴밀한 개인적 관계가 연준 의장으로서 오히려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여러 차례 시사했듯 금리를 1%까지 인하하라고 연준을 압박하기 시작한다면, 해싯이 대통령에게 그 조치가 역효과를 부를 가능성이 크다고 차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트럼프는 그러한 제안에 격렬하게 반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트럼프는 해싯을 잘 알고 신뢰하기 때문에 그의 의견을 경청하고 결정을 존중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무디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크 잔디는 “대통령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연준 의장 자리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케빈 외에는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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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de@fnnews.com 이병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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