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인문학자, ESG연구소장]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Die Klavierspielerin)(1983년)에서 주인공 에리카 코후트를 대명사로 지칭할 때 대문자 ‘그녀(SIE)’와 ‘그녀의(IHR)’가 사용된다. 한국어 번역본에는 대소문자 구분이 어려워 독일어 대문자가 사용된 대목에 굵은 글씨를 사용해 표시했다. 한국어 번역본만을 읽은 사람은 그저 강조 표시인 걸로 이해할 뿐 대소문자 구분에 따른 의미화를 짐작하지 못한다. 주석으로 설명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녀의 대문자는 단순한 강조를 넘어선 언어적 폭력이자 존재론적 심연이다. 일부 논문이나 비평가가 이 대문자 표기를 여성성의 고양이나 이상적인 주체로의 격상으로 오독하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텍스트가 널어놓은 섬뜩한 칼날을 간과한 치명적 오류다. 에리카에게 부여된 대문자 ‘그녀’는 주체적 자아의 선언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 기입된 ‘부정적 각인’이자 주체를 포획하여 박제하는 견고한 상징계의 벽이기 때문이다.
대타자(Grand Autre, A)와 상징계: 어머니라는 이름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대타자(Grand Autre, 대문자 A)는 주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며 주체를 규정하는 언어, 법, 질서, 사회적 규범의 총체인 상징계를 대변한다. 주체는 이 대타자의 장(場) 안에서만 말을 배우고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어머니는 (딸인 에리카와 달리) 고유한 이름 없이 오직 ‘어머니’라는 명명 혹은 기능으로만 존재한다. 그녀가 성(姓)을 물려주지 않는 어머니이기에 주인공 이름 에리카 코후트에서 이름뿐 아니라 혈연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고유명사 딸에 철저한 보통명사로 맞서는 어머니는 에리카에게 세계이자 법인 대타자(A) 그 자체다. 여기서 작가 옐리네크가 오직 에리카에만 사용한 대문자 ‘SIE’는 이 대타자의 욕망이 투사된 에리카를 의미한다. 어머니(A)는 에리카에게 ‘완벽한 피아니스트’라는 상징적 기표를 강요하고, 에리카를 자신의 소유물이자 욕망의 대리자로 박제한다.
따라서 대문자 ‘SIE’는 주체 에리카가 스스로 선택한 이름이 아니라, 대타자의 시선에 포획되어 ‘보여지는 나’로서 존재를 강요받는 상태다. 소설 속의 에리카가 기차 안에서 악기 케이스로 타인에게 물리적 가해를 가하는 행위는 이 견고한 상징계의 질서(대타자의 법)에 균열을 내보려는 처절한 시도이자, 동시에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억눌린 공격성이 기괴하게 분출되는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으로 이해해야 한다.
‘소문자 a’와 주체의 구멍: 상징화할 수 없는 잔여
작가가 에리카를 “구멍 난 주체”라고 규정한 이유는 그녀의 내면에 ‘소문자 a’ 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오해하듯 소문자 a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을 일으키는 ‘원인’이자 상징계가 결코 완전히 포섭할 수 없는 상징화 과정에서 발생한 실재의 잔여, 다시 말해 상징계 내부에 남은 실재의 효과이다.
주체가 상징계(언어의 세계)에 진입할 때, 유기체로서 발휘하는 순수한 생명력 중 일부는 언어로 번역되지 못한 채 탈락한다. 이 탈락한 조각이 바로 소문자 a다. 대문자 ‘SIE’가 상징계가 요구하는 매끈하고 우아한 외형(A)이라면, 에리카가 남몰래 자행하는 자해나 발작적인 폭력은 상징계로 통합될 수 없는 잉여, 즉 실재계의 흔적인 소문자 a의 분출이다.
그녀가 쥐고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가 민중의 눈에 ‘기관총’으로 치환되는 순간, 혹은 그녀의 행위가 ‘동물(das Tier)적’으로 묘사되는 지점은 매끈한 상징계의 질서가 찢어지고 날것의 실재계와 조우(tuché)하는 공포의 순간이다. 이 일그러진 이드(Id)의 형상은 대문자 ‘SIE’라는 기표 위에 가해지는 날카로운 긁힘이며, 상징화에 실패한 주체가 내지르는 비명이다. 작가가 소설에서 라캉을 의식하며 ‘구멍’이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을 전제한다. 페미니즘 일각에서 폄훼하듯 여성성의 비하는 아니다.
기표와 기의를 넘어선 ‘존재의 변이’
어떤 논문에서 ‘SIE’와 ‘sie’를 기표와 기의의 어긋남이나 미끄러짐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 텍스트의 폭력성과 존재론적 탐구를 너무 안이하게 해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SIE’와 ‘sie’ 사이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의 기호가 아니라 각자 다른 기호이다. 하나의 기호 안에서 평자들이 쓰기 좋아하는 어긋남과 미끄러짐이 있는 게 아니다. 반대로 전혀 다른 두 기호 체계, 즉 두 가지 존재 양식의 정면충돌로 보아야 한다.
독립된 두 기호의 충돌: 소문자 ‘sie’가 억압받고 분열되었지만 여전히 생동하는 ‘실재적 주체’를 지향하는 기호라면, 대문자 ‘SIE’는 대타자의 욕망과 완벽히 일치된 ‘상징적 자동인형’으로서 기호다. 이 둘은 같은 어원을 공유할 뿐, 주체라는 영토를 두고 서로 경합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핵심 격전지 도네츠크처럼 일진일퇴의 제로섬 투쟁이 벌어지는 전쟁터다.
존재의 변이: ‘sie’에서 ‘SIE’로 전이는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주체의 본질이 뒤바뀌는 ‘변이’다. 에리카가 자신을 낭만주의적 고양의 화신으로 연출할 때, 그녀의 존재는 이미 'SIE'라는 대타자의 기호에 완전히 장악되어 버린다. 이때 주체는 사라지고 오직 대타자의 시선에 응답하는 기표의 노예만이 남는다. 라캉의 통찰처럼, 하나의 기표(SIE)가 주체를 다른 기표(사회적 시선)를 향해 대변하는 과정에서 진짜 에리카는 기호의 틈새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자리로 남는다.
푄풍(Föhn)의 지형학
이 비극적인 구조를 가장 잘 설명하는 문학적 장치는 ‘푄풍’ 비유다. 산의 경사면을 타고 올라가는 공기가 습기를 잃고 정상에 도달했을 때, 그 너머로 불어오는 뜨겁고 메마른 바람이 바로 푄풍이다.
지형에 기반한 이 기후현상의 비유는 라캉의 주체 형성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산을 오르는 과정이 상징계에 편입되기 전, 온갖 가능성과 습기(생명력)를 품은 소문자 주체(sie)의 상태라면, 정상을 넘어선 후의 메마른 바람은 대타자의 요구를 완벽히 수용하여 생명력을 잃어버린 대문자 ‘SIE’다. 어머니라는 대타자의 압력(열기)은 에리카를 정상을 넘어선 건조한 바람으로 만든다.
소설 후반부 클레머라는 남성적 타자가 등장하며 대문자 ‘SIE’가 사라지는 현상은 흥미로운 전환점이다. 어머니라는 독점적 대타자(A)에 의해 지탱되던 상징계의 좌표가 클레머라는 새로운 욕망의 대상(소문자 a)과 마주하며 붕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문자 체계의 사라짐은 자유가 아니라, 에리카를 지탱하던 유일한 법의 소멸이며, 이것은 결국 그녀를 방어막 없는 실재계의 파멸로 직접 내던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기표의 미끄러짐이 아닌 존재의 파열
결국 옐리네크의 대문자 표기는 기표와 기의가 완벽히 밀착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문자 기표(SIE)라는 상징계의 감옥과, 그 감옥의 창살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문자 주체(sie)의 비명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존재의 파열음이다. 에리카는 대타자(A)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왔으나, 결국 그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실재계의 파편(소문자 a)과 마주하며 무너진다.
옐리네크는 대문자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대타자의 완벽한 기표(SIE)로 불리기를 강요당할 때, 우리의 진짜 욕망은 어떤 괴물이 되어 실재계의 구멍에서 튀어나오는가. 동시에 어머니로 회귀하는 소설의 결말은 허약함을 숙명으로 하는 주체에게 대문자적 삶의 불가피성을 말하는 것일까.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
▲Mother and Child (1984), Carl Newman (American, 1858-1932) |
[안치용 인문학자, ESG연구소장]
- Copyrights ©PRESSia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