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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눈치 보며…그들이 고독이란 ‘적’과 싸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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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5년 동자동(서울 용산구) ‘노란집’ 강제퇴거 당시 연희동(서대문구) 매입임대주택으로 이사한 엄장호(가명)씨의 원룸. 벽엔 “지금까지 고독과 싸우며 걸었던 가장 좋은 곳”인 전북 군산 고군산군도의 지도가 걸려 있다. 이문영 기자


‘시끄러운’ 쪽방촌을 떠나 조용한 빌라촌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적’과 대결했다.



장봉도(인천 옹진군) 바다로 추락하는 석양(2025년 11월11일)과 한탄강(경기도 포천시)의 멀미 나는 출렁다리(11월22일), 운길산(경기도 남양주시)을 오르는 텅 빈 눈길(12월14일)과 한 해를 보내는 무의도(인천 중구) 해넘이(12월31일), 새해 정동진(강원도 강릉시)을 들이치는 파도(2026년 1월3일), 그리고….



사진엔 찍는 사람의 마음까지 찍힐 때가 있었다. 날마다 지역을 바꿔 담아온 산과 섬과 바다 사이에서 손잡고 걷거나, 나란히 노을을 보거나, 서로의 어깨에 기댄 친구, 가족, 연인의 뒷모습들이 알싸했다. 그가 의식적으로 시선을 준 것인지 무의식이 눈을 잡아챘는진 엄장호(가명·80) 자신도 설명하지 못했다.



연희동(서울시 서대문구)으로 온 지 어느새 10년이었다. 그동안 엄장호는 “하도 다녀서 이제 갈 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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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해 밖으로





연희동 매입임대주택으로의 이주(2015년 5월21일)는 동자동(용산구) ‘노란집’ 강제퇴거(2015년 2월 건물주가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을 위해 주민 45명에게 전원 퇴거 통보) 당시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이사’였다. 1층 2명, 2층 1명, 4층 3명 등 6명이 고작 1t 트럭 두대도 못 채운 이삿짐을 싣는 동안 건물 전체가 들썩였다. 그들의 이사는 ‘끝까지 방을 지키겠다’던 노란집 주민들의 다짐이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체념으로 무너지는 계기였다.



“뿔뿔이 찢어지면 우리 고독사합니다.”



입주 신청서를 작성할 때 그들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에게 호소했다. 흩어지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받아들여져 한 건물에 살도록 ‘선처’됐다. 6명이 각자의 짐을 들고 방 하나에 작은 화장실이 딸린 각자의 소형 원룸으로 들어갔다.



“에라, 나가자.”



지하로 들어간 엄장호(노란집 404호)는 최선을 다해 방을 나갔다. 그는 “집에 있으면 잠만 자고, 그럼 정신이 멍해지고, 그러다가 안 아픈 데가 없다”고 믿었다. 밀림의 전쟁터(베트남전)와 사막의 건설 현장(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살아 돌아온 그였다. “죽지 않기 위해” 일주일에 최소 나흘은 집을 벗어났다. 그는 사방으로 걸었다. 북으로는 파주 문산 자유의다리까지, 서쪽으로는 배를 타고 인천의 섬과 섬들로, 동으론 강원도 고성의 화진포까지 올라갔다. “막혀도 지나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바닷가를 걷다 막히면 다음 해안선을 만날 때까지 바위를 넘었다. 깜깜한 산길을 “섬찟섬찟해하며” 헤맸다. 선착장에서 구급차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하루 종일 걸어도 사람 한명 못 만나는 날이 많았다. 그의 매일은 “길에서 고독과 싸우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고독은 ‘공통의 적’이었지만 그들 모두가 엄장호처럼 싸우진 않았다.



가난만으로도 방이 꽉 차 앉을 자리가 없는 동자동 사람들은 좋든 싫든 밖에서 타인과 부딪히고 섞일 수밖에 없었다. 그 ‘강제 소통’이 누군가에겐 삶을 지탱하는 ‘관계’였고 누군가에겐 피하고 싶은 ‘버거움’이었다. 동자동 쪽방을 떠나 연희동 원룸으로 온 그들은 가난에게 자리를 내주고도 발 뻗을 공간이 생기자 방 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본인은 금번 요원으로 선발된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고….”



1층 양진영(가명·70, 노란집 204호)의 입은 지금도 ‘에이치아이디(HID) 요원 수칙’을 자동재생했다. 고아원, 근로재건대, 북파공작원, 삼청교육대 등을 거치며 그의 뼈마디엔 불의했던 한국 현대사가 꼼꼼하게 달라붙었다. ‘빠루’는 여전히 그의 현관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몇년 전 아침에 양진영은 “2층 젊은 친구” 집 현관을 뜯었다.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쳐도” 응답이 없자 급하게 주워 온 빠루로 잠금쇠를 부쉈다. 사망 이틀 만에 발견한 남자를 경찰과 같이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집단이사 뒤 동자동에서 추가로 이주해 온 사람이었다. 우울증이 깊었다. 죽음은 양진영도 여러 차례 시도해본 일이었다. “옛 기억들이 살아나 한동안 동요”했다.



남자가 삶을 버린 집으로 지하 성덕윤(가명·71)이 지난해 7월 재이사했다.



그는 노란집(401호)의 ‘미남자’였다. 강제퇴거를 막아달라며 서울시장을 면담(2015년 4월)하는 자리에 비상대책위원장(106호, 2020년 2월 사망)을 대신해 참석했다. ‘미남이 한마디해야 한다’는 말에 끌려가듯 동행했으나 결국 “한마디도 못 하고” 나왔다. 오랫동안 속이 상했다. 연희동으로 온 뒤 암 수술을 세차례 받았다. 방의 습기도 아픈 무릎을 괴롭혔다. “술 좀 그만 마시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결국 죽어버린 친구”의 방으로 엘에이치가 이사를 권했다. “죽는 게 무섭지 않을 나이가 돼서인지” 사람 죽은 방에 사는 것도 무섭지 않았다. 무서운 건 혼령보다 계단이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에서 2층을 오르내리느라 “죽을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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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해’ 집 밖으로 나가 곳곳을 걷는 엄장호(가명)씨가 2025년 12월31일 인천 중구 무의도에서 찍은 해넘이 사진. 늘 혼자 걷는 그의 사진엔 ‘함께 있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했다. 엄장호 제공




“몇번 볼똥 말똥”





그 맛을 최용구(가명·65, 노란집 403호)는 평생 견디며 살았다. 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의 길이가 달랐다. 걸음걸이가 더딘 그는 연희동 입주 때도 다른 사람들이 먼저 찜하고 남은 3층 방을 받았다. 노숙 시절 최용구는 명의도용을 당했다. 자신도 모르는 자동차세, 과태료, 대출이자, 채무 추심 우편물들이 동자동에서 연희동까지 따라와 지금도 그를 괴롭혔다. 무서운 계단을 탓하며 그는 ‘무서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1층 조만수(가명·69)의 ‘세상’에선 개 짖는 소리가 났다. 14살 때 피 뽑아 판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상경한 그는 쫓겨나는 데 익숙했다. 노란집(109호)은 그의 세번째 강제퇴거였다. 연희동으로 함께 온 단짝이 이사 한달 만에 간다는 말도 없이 동자동으로 돌아가버렸다. 혹시라도 다시 올지 몰라 며칠 밤을 빈집 밖에서 서성였다. 외로워서 병원 치료를 받았다. 그때 방에 들인 강아지가 현재 세마리가 됐다. 조만수가 쓸쓸함을 버틴 건 인간들 덕이 아니었다.



“자꾸 저런 사람들을 데려다 놓으면 어떡해요.”



10년 전 이삿짐을 내리고 있을 때 ‘새 이웃’이 그들 보는 앞에서 엘에이치 직원에게 따졌다.



“동네가 위험해지잖아요.”



모두가 가난해 가난을 의식하지 않던 동네에서 가난이 민폐가 되는 동네로 이사 온 그들은 자신들의 가난을 눈치 보며 살았다. “힘없는 사람인 줄 아는지 연희동에선 모기들도 기를 쓰고 덤볐”(엄장호)다.



“1년에 몇번 볼똥 말똥이지.”(성덕윤)



이사 뒤 그들은 서로의 방에 자주 모였고 밥도 같이 먹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스치면 인사하는 사이”(양진영)가 됐다. 주거의 조건이 방의 상태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소리 지르고 싸우며 서로에게 노출된 동자동에선 그 때문에 완벽하게 고립되진 않았다. “이사 온 뒤론 아파서 방바닥을 기고 있어도 일절 몰랐”(엄장호)다. 그들은 각자 ‘파편’이 되고 있었다.



“여기 와 보니 ‘동자동이 우리를 보살펴 줬구나’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떠난 사람들이 고향처럼 찾는 동자동이었지만 엄장호는 지난 10년간 한번도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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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 강제퇴거 뒤 연희동으로 이사 간 양진영(가명)씨가 몇년 전 윗집 현관을 뜯을 때 사용했던 ‘빠루’. 집 안에서 사망해 있던 주민을 그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문영 기자


“거기 뭐가 있다고. 뒤돌아볼 것 없어.”



그 동자동으로 조만수의 단짝 고정국(가명, 노란집 101호)이 한달 만에 짐 싸서 돌아간 건 밥 때문이었다. 무료 점심 먹을 수 있는 곳을 연희동에선 찾기 힘들었다. 고정국은 동자동에서 백대진(가명, 노란집 206호)과 새 단짝이 됐다. 백대진도 연희동 집단이사 때 입주 신청을 했으나 떨어졌다. 연락 끊긴 가족과 부양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탓이었다. 2021년 ‘동자동 반세기 최대 이슈’가 터졌을 때 두 사람은 주민 대표(5회 ‘AI시대 박제된 가난’)가 됐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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