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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팔레비 왕조 ‘사자’, 저항의 상징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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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권이 축출한 왕조의 국기
反정부 시위 현장에 나부껴
조선일보

1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이란 반정부 집회에서 옛 팔레비 왕조의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 11일 영국 런던의 주영 이란 대사관 앞에서 열린 이란 반정부 시위 지지 집회. 한 남성이 대사관 건물의 국기 게양대로 올라가 이란 국기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가져온 깃발을 펼쳐 들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바탕색은 지금 국기와 같지만 가운데 칼과 초승달 문양 대신 황금색 사자와 태양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현 집권 세력이 축출한 팔레비 왕조(1925~1979) 시절 국기와 흡사했다.

17일째 이어지고 있는 이란 반정부 시위는 국경을 넘어 확산하고 있다. 수도 테헤란 등 이란 주요 도시는 물론 프랑스 파리, 미국 캘리포니아 등 해외 이란인 집회에서도 사자와 태양을 그려 넣은 옛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시위 군중은 이런 깃발을 흔들며 미국에 거주하는 마지막 왕세자 레자 팔레비의 귀국까지 요구하고 있다. 집권 세력의 퇴진을 요구하는 저항의 상징으로 멸망한 왕가의 문양이 등장한 것이다.

현재 이란 공식 국기 중앙에는 ‘알라(신)’를 도안화한 붉은 문양이 들어 있다. 초록·빨강 띠 경계에는 이슬람 핵심 교리인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시다)’가 22번 반복돼 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승리일인 이란력 11월 22일을 기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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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자 팔래비 왕세자와 옛 이란 왕조 국기 /로이터 연합뉴스


사자와 태양은 팔레비 왕조 이전부터 이란의 정체성을 상징했다. 사자는 고대 중동에서 지혜와 용맹함을 뜻해 왕의 문장으로 널리 쓰였다. 이슬람교 전래 뒤에도 이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이란의 주축 이슬람 시아파에서는 가장 중요한 종파 지도자로 추앙하는 이맘 알리를 ‘신의 사자(아사둘라)’라 불러왔다.

16세기 사파비 왕조를 통해 사자와 태양이 국가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1501년 건국한 사파비 제국은 1576년부터 이 문장을 깃발에 새기기 시작해 멸망할 때까지 사용했다. 사자는 알리를, 태양은 고대 페르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성군(聖君) 잠시드를 상징한다. 페르시아 전설에서 잠시드는 300년간 왕으로 재위하며 황금기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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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반정부 시위에 등장한 팔레비 왕조 시절 국기. 페르시아의 상징이기도 했떤 사자와 태양이 가운데 그려져있다. /위키피디아


깃발에 그려진 사자는 실제로 이란에 서식했던 페르시아사자를 바탕으로 형성된 도상이다. 페르시아사자는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란 전역에 서식했으나 20세기 중반 무분별한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야생에서 멸종했다. 페르시아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이란인들의 상징으로 인식됐던 사자와 태양은 이후 500년 넘게 계승됐다. 19~20세기 민족주의 시대에는 특정 왕조를 넘어 이란 민족 전체의 상징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1979년 왕정이 붕괴되면서 국기에서 지워졌다.

사자와 태양을 그린 옛 국기의 등장은 단순한 왕정 복고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이슬람 근본주의로 인권을 탄압하고 경제를 파탄 낸 집권 세력에 대한 강력한 증오의 표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젊은 세대 상당수는 이 깃발을 혁명 이전의 이란, 즉 ‘민족 정체성·세속주의·자유’를 상징하는 반체제 아이콘으로 인식한다. 구체적인 왕정 복귀까지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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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이란에도 살았던 아시아사자. 지금은 인도 기르 숲에서 당국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Gir National Park


이란의 숙적들도 ‘사자와 태양’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X는 지난 10일 이란 국기 이모티콘을 옛 국기로 바꿔 이란 정부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이란 외교부는 즉각 공식 계정에서 이란 국기 이모지를 삭제했다.

지난해 6월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당시 작전명이 ‘일어나는 사자(Rising Lion)’인 것도 이런 점을 감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이 백성이 암사자같이 일어나고 수사자같이 일어나서’라는 성경 구절을 연상시킨다”며 “이스라엘이 사자처럼 이란을 공격하겠다는 의미와 더불어 왕정 복고를 바라는 뜻을 시사했다는 이야기가 현지에서 돌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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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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