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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늦으면 실패자인가… 누군가의 후회 [일요일 새벽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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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
더스쿠프

황혼 무렵


어둠이 내리는 황혼 무렵

느릿느릿 걷고 있는 나를 가로지르며

두어 마리 새가 쏜살같이 날아간다


앞산 마루엔 한가로이 떠 있는 노을

이내 스러질 텐데 저리도 느릿한 건

나와 보조를 맞추려 하기 때문일까


어느새 젊은이 몇이 앞지르기로 가고

뒷모습마저 보이지 않는다


홍단풍 잎들이 가지를 붙들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는지는 가름할 수 없다


황혼 무렵에는 왜 자꾸만

걸음걸이가 느려지는지 생각해본다


앞만 보고 가던 시절도 있었으나

이젠 서둘러 가고 싶은 곳도 없다

가야 할 곳도 거기가 거기만 같다


하늘엔 별들이 서둘러 돌아온다

마을 불빛이 환하게 켜지고 있지만

나는 느릿, 느릿, 걷는다


「유리벽 안팎」, 문학세계사, 2023년.


지금 이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4차산업혁명 시대, 인공지능 시대, 디지털 혁명 시대 등 여러 가지 용어가 있지만 나는 가속도의 시대 혹은 속도전의 시대로 명명하고 싶다. 10년 전의 스마트폰, 5년 전의 스마트폰, 그리고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의 기능을 생각해본다. 정말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문명의 발전 속도는 세상을 '눈 깜짝할 새'에 바꿔놓는다. 내가 대학 시절에 한 대 갖고 있기를 소망했던 전동타자기, 대학원 시절에 유행했던 워드 프로세스, 회사에 입사해서 받은 IBM PC는 지금 박물관에 진열돼 있을 것이다. '삐삐'라는 이름의 기기를 요즘 아이들은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어떤 용도로 쓰던 물건인지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더스쿠프

더스쿠프

[사진 | 문학세계사 제공]


시인의 연세를 헤아려본다. 70대 중반인데 이제 만으로 나이를 세야 하니 정확한 연세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시의 화자는 가속도 혹은 속도전의 시대에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고 있다. 쏜살같이 나는 새와 느리게 지는 황혼이 대비를 이룬다. 현대사회에서 속도는 미덕이요 느림은 어리석음이다. 한발 늦으면 패자가 아니라 실패자가 된다. 실기失期하면 영원히 낙오자가 된다.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보니 화자도 나를 지나쳐 가는 젊은이들처럼 앞만 보고 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서둘러 가고 싶은 곳도 없다고 한다. 경쟁사회에서 아득바득 살아온 자신의 생을 회상해보니 꼭 그렇게 '가야 할 곳'을 향해 정신없이 걸어갔던 것이 현명한 태도였나, 후회가 되는 것이다. 인생의 황혼 무렵, 나도 시인처럼 여유 있는 산책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승하 시인 | 더스쿠프

shpoe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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